근대사회가 법치주의의 확장을 요구하는 시대였다면, 현대사회는 법치주의의 절제를 요구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도덕과 법, 법과 정치의 한계는 어디일까? 윤석열 검찰총장 체제하에서 법치주의의 한계를 생각하는 국민이 많아지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네 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영어권 백인들의 영화잔치라는 오스카상이 2020년, 한국의 기생충에게 잡아 먹히고 말았다.

검찰은 조국 전 법무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에 대한 입시 관련 표창장 위조사건이나 최강욱 공직기강비서관에 대한 인턴증명서 위조 같은, 종래 같았으면 자녀 입시와 관련된 사소한 것들을 피의자 소환조사 한 번 없이 기소함으로써 도덕적 비난으로 그칠 수도 있는 것을 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어디 그뿐인가. 어찌 보면 정치 행위일 수 있는 울산시장 후보 선발과정을 선거법위반이라며 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재판절차가 남아 있지만, 법조인으로 하여금 윤리적 도덕과 법, 재량적 정치행위와 법의 한계를 어디까지로 구별지을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법의 간섭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숨통은 조여들 것이고 재량적 정치행위를 스스로 감시하고 감시받는 타율적 삶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에서 법 적용의 지나친 확장성이 넘긴 폐해는 향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인을 놀라게 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주인공 기우와 기정 남매의 ‘대학재학증명서 위조’로부터 시작한다. 재수생 남매가 고교생 과외 자리 하나를 얻으려고 위조범이 될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을 목격하며 가슴이 싸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웃을 수밖에 없는 희극적 요소 앞에서 울컥할 수밖에 없는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처절하게 희극적인 저 자리에 윤석열 검찰의 추상같은 법의 메스가 가해질 때 우리는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기생충은 살아 있는 자의 몸을 숙주로 삼는다. 산 자는 스스로 몸에 기생충을 지니고서도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숙주가 죽어 넘어지면 그때 비로소 스멀스멀 숙주의 몸을 비집고 나와 자신을 가두었던 숙주를 갉아 먹는다. 산 자가 기생충의 밥이고, 기생충이 산 자의 몸에 갇힌 종속적 이중성을 영화 ‘기생충’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으로 세상이 소란하다. 숙주와 기생충이, 감염바이러스와 피감염자가 서로 엉켜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법이 무소불위의 정의라며 설쳐대는 것은 법 만능주의라는 쇠창살에 갇혀 사는 우리 법률가들뿐이지 않을까? 기생충은 영화 ‘기생충’을 통해 세계인의 통점을 하나로 관통한다. 우리 법률가들은 기생충 안에 갇힌 숙주인가, 숙주 안에 갇힌 기생충인가?

 

 

/오시영 변호사

서울회, 법무법인 동서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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