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자(庚子)년 새해가 밝았다. 60년만에 돌아오는 ‘흰쥐 해’ 라고 한다. 12간지의 첫 번째 동물인 쥐는 영리함과 다산, 풍요, 번영을 상징한다. 쥐띠 해에 태어난 사람은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하며 먹을 복도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쥐띠 해에 아이를 낳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올해는 인구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인구는 국력이다. 올해 다산의 상징인 흰쥐 해를 맞아 나라의 동량이 될 아이들이 보다 많이 태어났으면 한다.

올해는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원년(元年)이다. 국가적으로는 제21대 총선이 치러지는 해다. 향후 4년의 국가 운명을 좌우할 중대 정치 일정이다. 식물국회에 동물국회라는 역대급 오명을 뒤집어 쓴 20대 국회를 반면교사로 삼아 제21대 총선은 반드시 낡은 정치청산의 대전환점이 되어야한다.

한편, 내 개인적으로도 올해는 좀 특이한 해다. 불혹의 나이를 갑절이나 먹는 해다. 나이가 결코 자랑일 수는 없지만 막상 나이가 들고 보니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아파트 16층 베란다에서도 해돋이를 능히 볼 수 있지만 오늘은 작심하고 동이 틀 무렵 집을 나선 후 인근의 오룡산을 찾았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니 멍석이 깔린 듯한 등산로가 구불구불 이어진다. 적당한 간격의 가로등 불빛이 안내판 구실을 한다. 이른 아침이어선지 인적이 드물고 호젓하다. 숲속에 들어오니 제법 아늑하고 포근하다. 싸묵싸묵 걸으며 상념에 젖기에는 안성맞춤인 때와 장소다.

우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발자취를 찬찬히 되돌아 본다. 정말 제대로 살아온 것일까? 나는 흔치않은 법조인 대가족(6명)의 가장이다. 반 백년이 넘게 법조의 외길을 걸어왔다. 내 딴에는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되지만 막상 이루어 놓은 것이 별로 없다. 남겨놓을 것도, 내세울만한 것도 딱히 없다. 오직 독선과 편견, 그리고 오만과 알량한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나 혼자만의 아성을 쌓고 그 안에서 독거하며 그것이 행복인양 자기합리화로 스스로를 속이며 금쪽같은 세월을 허송한 것만 같다. 남은 것은 허무감과 회한 뿐이다.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어느새 정상에 이르렀다. 기껏해야 해발 300미터도 채 안되는 야트막한 산이다. 높게 자리잡은 정자에 올라 영산호 건너편의 동쪽하늘을 바라보니 이미 붉게 물들어 있다. 이윽고 시뻘건 태양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시인 박두진의 ‘해’라는 시(詩)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산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새해라고 해서 태양이 새로울 것도 없고 네모난 해가 뜨는 것도 아니지만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일출은 여느때와 다른 느낌이다. 상서로운 태양빛이 영산호 물안개를 헤치고 솟아오르는 광경은 가히 신비롭고 장엄하기까지 했다. 하산길에 다리도 쉴 겸 길가의 벤치에 앉아 카카오톡을 열어 보았다. 절친한 친구의 새해 메시지가 눈에 띈다. “친구야, 이젠 정말로 다 내려놓고 적더라도 나누고 베풀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나날을 보내자”는 내용이다. 참으로 마음에 와닿는, 우정어린 덕담이고 뜻깊은 배려의 글이다.

근심, 걱정 한다고 꼬인 일이 풀릴 것도 아니고 욕심을 부린다고 바라는대로 다 이룰 수도 없는 나이다. 뼈저린 후회를 해봐도 이미 잘못 살아버린 인생을 다시 살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얼마 남지않은 살 날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정말 답은 없는 것일까?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쇼는 95세에 임종하면서 묘지명에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어”라고 새겼다고 한다. 정말 어영부영 하다가 이대로 삶을 마감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고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 아니던가? 이젠 정말 다 비우자. 모든 것을 훌훌 내려놓자.

‘무소유 정신’을 삶으로 가르친 법정스님의 법문 한 구절이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 때일 뿐. 그러나 그 한 때를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옳은 가르침이다. 인생 여정은 순간순간의 모음이다. 순간순간이 모여 하루를 이루고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내 인생의 황혼녘이다. 길어봐야 10년 남짓 더 살 것이며 하나님이 부르시면 오늘이라도 당장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렇기에 하루하루를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더욱 신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고 싶다.

 

 

/임태유 변호사

광주회·법무법인 새천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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