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들 몇 명과 수다 떠는 ‘단톡방’을 만들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사달이 났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싸고 ‘광화문파’와 ‘서초동파’로 갈렸습니다. 검찰 개혁, 입시의 공정성 등 결론내리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온갖 단어들이 대화창을 가득 메웠습니다. 수사 상황이 조금씩 드러낼 때마다, 혹은 유튜브 등을 통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대화창에 말이 보태졌고, 수다는 절박한 사생결단이 됐습니다. 결국 한 명은 ‘단톡방’을 나갔습니다. 눈처럼 나부꼈던 대화창의 어지러운 말들이 요설(妖說)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 지금보다 5백 년 더 젊었을 때, 모든 사건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선명한 윤곽을 갖고 있었다.”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쓴 ‘중세의 가을’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중세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상과 느끼는 감정이 모두 극단으로 치달았다는 겁니다. ‘모 아니면 도’의 생활화입니다. 15세기 프랑스 왕 샤를 7세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슬퍼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왕이 투옥되자 사람들은 앞 다퉈 왕이 갇힌 모습을 구경하러 갔다는 말도 있습니다. 왕의 죽음에 대성통곡을 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왕이 고꾸라지는 모습을 굳이 관람하려 드는 군중의 가학적 모습도 그다지 유쾌한 광경은 아닙니다. 지난해는 한국 사회가 중세로 퇴보하는 것은 아닌지 헷갈리는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은 물론이고, 세 명 이상 모인 ‘단톡방’에선 희로애락이 극단으로 치달아 정치 세력 간 쟁투의 장이 펼쳐지곤 했습니다. ‘분노 아니면 열광’이 어느덧 생활화됐습니다. 돌이켜보니 흑과 백으로, 선과 악으로 양단할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회색이다.” 회색을 즐겨 사용하는 독일 화가 안젤름 키퍼의 말입니다. 흔한 아포리즘으로 흘려듣기보다 현재 한국 사회로 끌어오고 싶은 말입니다. 세상사는 얼핏 흑과 백으로 뚜렷하게 판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흑과 백의 무수한 망점들로 구성된 회색인 경우가 많습니다. 조국 전 장관 사태의 진상도 납작한 흑백 평면이 아니라 회색 다면체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내가 파악한 진실이 회색에 불과하다’는 지극히 겸손한 판단의 전제는 ‘상호 관용’ 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이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 수호의 핵심 역할을 하는 규범으로 꼽았던 것도 ‘상호 관용’입니다.

설 연휴 기간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정치 이야기로 다투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다짐은 ‘회색빛 여유’ 어떨까요? ‘단톡방’을 나갔던 그 분도 다시 초대해봐야겠습니다.

 

 

/이권열 MB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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