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생활 약 30년을 나름대로 제법 그럴듯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뒤돌아보니 부나 명예나 참으로 민망할 뿐이다. 군자의 도를 간다고 하면, 성인의 성(聖) 자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귀(耳)로는 천시(天時)를 보고 입(口)으로는 지덕(地德)을 맛보면서 왕(王)의 임무를 수행함에 따른 명예를 이룩하든지, 대인(大人)으로서 이 세상을 태평하게 이끄는 재물이라도 이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행복이 신체 내부의 쾌락적 감각이라면, 뇌내 마약물질인 도파민, 엔돌핀,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 뇌의 생화학적 시스템을 개조하여 일정한 수준의 행복수준을 유지하도록 프로그램하면 될 것이다. 진화심리학에 의하면, 성관계로 유전자를 퍼뜨리면 쾌감이라는 보상이 주어지지만, 그 쾌감은 재빠르게 사라지는 방향으로 인류가 진화하였다는 것이다. 행복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개인적 확신이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집단적 신앙 내지 환상과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관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행복에 관한 군자로서의 가치체계는 무엇일까?

인부지(人不知)라도 불온(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내 비록 대인의 풍모로 성현의 이치를 실현하여 요순의 꿈을 꿔 왔건만, 이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고 그렇더라도 그저 그러려니 미소로 받아들이니, 나를 객관화한 지족(知足)의 만족감일 것이다. 돌이켜 볼 때, 처음 법조인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면서 성장해 나아감에, 나 스스로의 기쁨에 재잘거리니, 나만의 세계에서의 기쁨이 있었다. 이것이 학이시습(學而時習)이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그 다음, 이미 성장된 법조생활 속에서 눈빛만 보아도 널 알기에 매일 같이 있어도 질리지 않던 친구가 한 동안 멀리 뜸하다가 만나니, 너와 나의 공감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것이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다시 고개 들어, 앞으로 전개될 4차 산업 과학혁명의 결과를 내다보게 된다. 생물학의 수준에서는 인간이 유전자 이식 등 생명현상에 계획적으로 개입하는 생명공학, 유기물과 무기물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사이보그공학,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게 하는 비유기물공학 등등! 상상의 미래와 함께 나 자신의 지족 내지 행복의 문제를 새삼스럽게 화두로 떠올린다. 나 이제 불역군자호를 외쳐 보면서 다시금 돌이켜 처음처럼 배우고 또 배우니, 학문하는 그 자체가 이제 습관이 되어 호학(好學)의 기쁨!

관점을 달리하여, 학이시습의 ‘시습(時習)’의 의미와 관련하여, ‘배우고 때로(occasionally) 익히다’라는 의미로 파악하기도 하고, ‘배우고 때가 되어(timely) 실습하다’라는 의미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배움도 때가 되면 습관화(habitually)된다’라는 의미로 파악하니, 대가의 그림이 어린아이 같은 동심의 재해석에서 발견되듯이, 배움(learning)과 철학(philosophy)의 유사성이 느껴진다.

 

 

/김병철 변호사

충북회·법무법인 청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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