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륵, 쏘-옥” 지하철 선로에 지갑이 빠졌다.

12월 마지막 금요일, 퇴근 시간 2호선은 어마어마했다. 내가 내릴 곳은 아니었으나 다른 승객들을 위해 일단 내렸다 타야 했다. 바로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이 스르륵 빠져나가더니 승강장과 전철 사이의 좁은 틈으로 쏙 들어가고야 말았다. 주변에선 “어머나”하며 술렁였고, 나는 망연자실 선로 안을 바라보았다. ‘전철이 출발하면 얼른 내려가서 주워올까? 그러다 못 올라오면 어떡하지?’ 갈등하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전철이 출발하자 스크린 도어가 닫혀 어차피 내려갈 수 없었다.

역무실을 찾아가니 20대 청년이 홀로 있었다. 청년은 낙담한 채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내 얘기를 차분히 듣더니 “운행이 끝나면 선로작업을 하면서 찾아놓을 테니 내일 오세요. 찾으면 바로 문자 넣어 드릴께요”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감사의 답문을 보냈다.

달콤한 귤 한 봉지를 들고 찾아 갔다. 어제 그 청년 대신 더 어린 청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역시 친절했다. 역무실을 두 번 방문했는데 모두 청년 한 명뿐이었다. 오후 늦게 답문이 왔다. 교대 근무라서 아침에 퇴근했다며 새해 인사까지 곁들여서. 반가웠다.

살면서 어림잡아 스무 번은 넘게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한 번도 돌아오지 않은 적이 없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거나 시간이 걸려도 어떻게든 내게 돌아왔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버스기사님이 집 전화로 연락을 해서 몇 시에 우리 집 앞 정류장을 지나간다며 나와 있으라고 하시고는 도킹하듯 지갑을 건네주고 가셨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면 나를 힘들게 한 사람보다는 도움을 주고 친절을 베푼 사람이 월등히 많다. 과연 내가 특별히 운이 좋았던 걸까? 이것이 내가 성선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갈수록 실망이 커져만 가는 세상 속에서 두 팔 들고 성악설로 슬금슬금 옮겨 타려는 나를 가지 못하게 붙든다.

연말에 만난 따뜻한 두 청년을 포함하여, 땀으로 자신의 삶을 묵묵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축복이 내리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이수연 변호사

서울회·법률사무소 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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