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지방법원에서 형사 재심사건이 진행 중이다. 확정된 죄명은 소요, 계엄법위반, 특수절도, 도주이다. 소요 및 계엄법위반 요지는 1962년생 피고인이 1980년 5월 22일 카빈소총 1정을 지급받고 성명불상 폭도 30명과 함께 버스를 타고 계엄 해제 구호를 외치는 등 광주시 일원의 질서와 평온을 해함과 동시 정치적 시위를 금하는 계엄사령관의 조치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주의 요지는 피고인이 1980년 7월 5일 전남합동수사단에 의해 구속된 후 빈혈로 광주통합병원에 가료 중 관리 소홀을 틈타 병원 변소 창문을 넘어가 구금장소로부터 도주했다는 것이다.

수사기록은 1980년 5월 29일 광주경찰서 범죄인지보고부터 시작해, 1980년 7월 30일 전교사 검찰부 검찰관 소령이 작성한 피의자신문까지 이어지고, 재판기록은 전교사계엄보통 군법회의 1980년 8월 1일 공소장으로 시작해 1981년 3월 31일 대법원 판결로 종결된다.

만 17세 소년 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 온갖 고문에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후송된 틈에 창살을 뜯고 외갓집 고흥까지 피신했다가 불과 3일만에 체포됐다. 피고인은 구속, 재구속, 복역 후 고문에 의한 외상후스트레스(PTSD), 척추 질환으로 몰핀과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불구의 방외자가 되고 말았다. 꿈 많던 17세 소년의 인생은 1980년 5월 광주공원에서 광주도청으로 향했다는 이유로 몰핀과 휠체어의 만신창이 악몽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법원이 올해 8월 30일 재심개시를 결정해 명예회복의 길이 트였고, 피고인의 희망에 필자가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다.

돌이켜보면, 재심의 근거는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제4조가 정한 특별재심이고, 이는 전두환의 1979년 12월 12일 사건을 군사반란, 1980년 5월 18일 계엄포고를 헌정질서파괴범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계엄군의 헬기 기관총 사격은, 수많은 증인과 전일빌딩 총탄 물증으로 법적·역사적 진실이 됐다. 그럼에도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적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대통령 취임을 위해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킨 장본인이 할 말이 아니었다. 지난 3월 사자명예훼손 재판에 피고인으로 출석하면서 심경을 묻는 기자를 향해 “이거 왜 이래”라고 역정을 내더니, 며칠 전에는 12.12기념 고급 오찬까지 가졌다고 한다. 헌정질서파괴범죄를 자찬하는 그의 당당함에 필자는 당황스럽다.

아마도 재심 사건의 피고인 사건과 전두환의 사자명예훼손 사건은 비슷한 시기에 선고될 것으로 보인다. 치매 등 건강 상 이유를 주장하는 전두환 피고인이라도 선고기일에는 출석해야 할 것이다. 그 때에는 제발 역사와 시민 앞에 참회하는 모습이길 바란다. 가해자의 사죄와 참회는 피해자의 용서와 화해에 선행해야 한다. 일본국 아베 총리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피고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김상훈 변호사

광주회·법무법인 빛고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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