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기자 시절 얘기다. 경찰서 2진 기자실이나 구석진 동네 카페에서 낯선 교수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게 일상이었다. 기사의 적재적소에 들어갈 멘트를 얻어내라는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눈치 없이 듣는 그대로 보고했다. 그럴 때마다 선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기사의 ‘야마’와 맞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지만, 기사에서는 ‘야마’가 실존에 앞선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야마’에 맞게 취재하는 기자가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체득하는 시절이었다.

취재 내용에서 기사 방향을 찾는 것인지, 기사 방향에 맞게 취재 내용을 끼워 맞추는 것인지. 손쉬운 길은 후자였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고상하게 말하면 ‘정무감각’ 저렴하게 말하면 ‘눈치’였다. 데스크는 깔끔하게 떨어지는 기사를 원했다. ‘야마’에 어긋나는, 다시 말해 정무감각을 상실한 취재는 ‘킬’됐다. 이것이 언론 생태계의 작동방식이고 직업윤리였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지난 17일 열린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또 하나의 명언을 내놨다. 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이 “2013년 국정감사 발언(‘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이후 검사로서 변한 게 없다고 자부하느냐”고 묻자 윤 총장은 “자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무감각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답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수사에 있어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취지였다.

청와대가 윤 총장에게 기대한 것이 ‘조국 수사’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가 이 수사로 얻을 이익이 분명치 않다는 점도 그의 발언을 뒷받침한다. 그는 전 정부, 그리고 이번 정부의 ‘야마’에 맞지 않는 문제적 인물이었다.

윤 총장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의 눈치 없음을 옹호하려 한다. 심각한 수준의 정무감각을 지지하려 한다. 이는 ‘야마’에 길들여진 자신에 대한 환멸감 때문이기도 하다. 현실은 복잡하고 미묘하다. 현상에 대해 깔끔하게 떨어지는 설명이야말로 비현실적이다. 이번 사건에서 정무감각 없는 자들의 ‘아웃팅’이 이어졌다. 참여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인 김경률 회계사는 페이스북에 상스러운 욕을 써가면서 한때의 동지들을 말로 무참히 베었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조 전 장관을 인사청문회에서 몰아붙이면서 ‘팀킬’에 나섰다. 그가 내세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도입 반대 논리는 야당보다 날카롭고 명쾌했다.

정무감각이 미덕이 아닌 시대가 한걸음 가까이 온 듯하다. 머지않아 눈치 없는 자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리라. 다 조 전 장관의 공이다. ‘야마’가 실존에 앞서지 않고 실존이 ‘야마’에 앞선다는 것을 깨닫는 사회가 속히 오길, 간절히 바란다.

 

 

/구자창 국민일보 기자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