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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미술]법이 인정하는 미술은 어디까지인가
김영철 변호사  |  yckim59@jsla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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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호] 승인 2019.09.02  1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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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미술이란 이상(Idea)에 대한 모방이었다. 이때의 모방은 단순한 베끼기를 넘어 ‘진짜’와 같은 존재를 창작할 수 있는 마술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얼마나 재현할 수 있는지가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미술을 “모방(mimesis)의 기술(techne)”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술은 더 이상 무언가를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1950년에 접어들자 저명한 미술사학자 E.H. 곰브리치는 급기야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동시대 미술에 접어들면서 미술의 범위와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심지어 미술의 경계에 대한 질문 자체가 작품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미술을 정의 내리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미술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현대미술은 투자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아져, 세금 부과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술의 정의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실제로 법률상 미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국내외적으로 소송이 제기된 사건들이 여럿 발생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소송으로는 휘슬러와 러스킨의 명예훼손사건(1878년, 영국), 브랑쿠시의 ‘공간속의 새’ 관세사건(1926년, 미국), 김수자의 ‘바늘여인’ 관세사건(2004년, 한국)을 들 수 있다.

19세기 영국 휘슬러와 러스킨의 사건을 시작으로 21세기 김수자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미술계가 법정에서 주장하고 있는 미술작품의 정의는 비슷하다. 작가의 ‘생각과 관념’ 자체만으로도 미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휘슬러는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불꽃놀이를 그렸고, 브랑쿠시는 새의 개념을 부여한 조각을 만들었으며, 김수자는 자신의 몸을 바늘 삼고 도시를 캔버스 삼아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다양한 논의를 거쳐, 법은 이 작가들의 생각과 관념을 미술작품으로 인정해주었다.

지난 2006년, 영국에서 또 한번 미술작품의 정의가 법정에 오른 사건이 있었는데 댄 플래빈의 형광등 설치작품이 그것이다. 영국세관은 형광등을 조명장치로 분류해 관세를 부과했으나 소송을 통해 조각작품으로 판결이 내려졌다. 만일 댄 플래빈이 형광등에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이 형광등은 그저 공장에서 생산된 조명장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셸 뒤샹이 소변기를 전시실에 놓고 ‘샘’이라 명명한 이후로 미술의 정의는 더욱 예측 불허가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것을 찾아 시대를 탈피하려는 작가정신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미술의 정의 또한 변화하고 있다. 한편 변화하는 미술이 인정받기 위해서 법의 적절한 해석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미술이 매력적인 투자의 대상이 될수록 법의 인정을 더욱 필요로 할 것이다.

/김영철 변호사

법무법인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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