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법원장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는 사상 초유의 재판을 몇 달째 지켜보며 머릿속을 가장 많이 스쳐간 물음이 있다. ‘원래 저렇게 하는 건가? 왜 그동안 한 번도 못 봤지?’ 재판이 열릴 때마다 변호인들에게서 새로운 주장이 나오고 그 주장을 판단하기 위한 지루하고 복잡한 절차가 반복되는 것이 어쩐지 생소하기만 했다. 증인신문을 앞두고 법정에 나올 증인에게 제시할 문건의 증거능력을 따지기 위해 검증이라는 것을 하고, 그 과정에서 1000여개의 한글 파일을 일일이 열었다 닫았다, 이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모습을 이전에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을 공부한 전문가도 아닌데다 모든 재판을 들여다 본 것도 아니지만, 2년 남짓 사이 전직 대통령 두명, 굴지의 재벌 총수와 대기업 회장 몇명, 전직 고위 관료들이 수두룩하게 거쳐간 법정에서조차 지금과 같은 촘촘한 증거능력 공방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물며 ‘법꾸라지’라고 불렸던 피고인들에게서도 ‘해시값(hash value)’ 운운하는 주장은 별로 기억에 없다.

전례가 없는 공소사실에 보고체계에 따른 진행 과정을 명확히 해야 하는 복잡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피고인석에 세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의 재판은 그 자체로 특수하긴 하다. 게다가 1000개가 넘는 문건의 수정 날짜와 글씨체, 형광펜 표시 자국까지 모두 따지기 위해 파일을 일일이 열어보자는 주장은 재판 진행을 늦추고 시간을 끌기 위한 의도로 보일 여지도 컸다. 검증을 통해 드러난 증거 조작 같은 건 없었고 변호인들의 위법수집증거 주장은 번번이 재판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른 사이 양 전 대법원장은 석방됐으니 나름 성공한 전략이기도 했다.

기사 한줄을 쓰기 위해 형사소송법과 규칙을 들춰보게 만드는 이 많은 주장들이 왜 다른 법정에선 나오지 않았을까. ‘증거능력’을 두고 다툴 수 있는 게 이토록 다양한데 왜 다들 그냥 넘어갔던 것일까. 가장 많이 들은 답은 ‘재판부 눈치를 보느라, 찍힐까봐’라는 말이었다. 재판을 복잡하게 만들수록 판결에 불리해질까봐 적당히 넘기는 것들도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피고인이 돼서도 까마득한 후배 판사들의 눈치를 조금도 살피지 않는 전·현직 고위 법관들의 태도가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다. 자신들이 재판할 때는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면박줬을 주장들을 막상 칼날 위에 선 뒤에야 문제 삼는 것도 충분히 화를 불러왔다.

누군가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법정에서, 누구에게도 그냥 적당한 것은 없어 보인다.

 

 

 

/허백윤 서울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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