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근 변호사

10여년간 검사로 재직, 농사일, 100일간 출가, 변호사 개업 등 다양한 이력이 있으신데요. 변호사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삶을 사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검사나 판사를 그만두면 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시골로, 절로 들어갔으니 좀 특이하게 보이기는 할 겁니다. 조금은 남다른 삶의 계기는 산속 고시원에서 시험 공부할 때 겪었던 경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전 가정환경 때문인지 굉장히 소심했습니다. 가난한 소작농에다 아버지 주사가 심해 집이 어두웠지요. 저도 어둡고 열등감이 많아, 스스로를 솔직히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친구가 없었고,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절에서 운영하는 고시원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했는데 어느 순간 ‘더 이상 소심하게 살지 말자,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살자’고 ‘큰’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처음에는 몸과 마음이 무척 편하고 자유로워진 것처럼 느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 보다 더 큰 불안과 함께 신체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불안을 달래기 위해, 매일 오후 5시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30분 정도 걸리는 암자로 산보를 다녔습니다. 산보를 하면서 매일 마주치는 나무 중에 음지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앙상한 나무가 있었는데, ‘봄이 되면 나뭇가지에 정말로 싹이 틀까’ 하는 의심이 들었고, 매일 눈여겨봤습니다. 봄이 되자, 절대 싹이 틀 것 같지 않던 그 나뭇가지에서 싹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마치 죽어있던 제 몸에서 싹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아있구나. 그때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었습니다. 자연에서 큰 가르침(자신감)을 얻은 것이지요.

불교도 이 무렵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특히 라디오에서 법륜 스님의 ‘알기쉬운 반야심경’ 강의를 들은 것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 두 가르침 속에서 제 삶도 변화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 아니 이 세상 전체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자연스럽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생태농사는 그런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전주, 인천, 서울에서 검사를 하면서 작은 평수를 분양받아 주말농장을 했고, 제대로 된 공부를 위해 서울생태귀농학교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이어져 변호사를 하는 지금은 텃밭을 크게 넓히고, 오두막을 짓고,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전부 퇴비로 만들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변호사님께서 ‘검사 그만뒀습니다’라는 책을 쓰셨던데요. 어떤 동기로 쓰셨고 어떤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검찰에서의 조직생활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제 성격과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용기가 없었고, 고향인 청주에서 검사를 하다가 개업해서 전관예우를 받자는 알량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지요. 전 오래 전부터 노 대통령의 솔직함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좋아했습니다. 충격이 컸지요. 전관예우나 바라며 검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스스로가 엄청나게 부끄러웠습니다. 덕수궁 앞에 차려진 노 대통령의 빈소를 참배한 후, “더 이상 비겁하게 살지 말자”고 마음먹고 사직을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검사를 그만둔 후 바로 개업을 하지 않고 잠시 농사를 짓고 백일출가를 한 것을 알게 된 한 출판사 요청으로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책에는 앞서 잠시 언급한 어린 시절의 소심함과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아버지에 대한 미움, 어머니에 대한 집착, 검사와 변호사 하면서 경험한 이야기, 제가 겪은 농사와 불교 이야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검사, 농업, 변호사 모두 쉽지 않은 일인데요. 세 직업 중에서 어떤 일이 가장 힘드셨고, 각 직업별로 어떤 소회를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검사 시절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변호사 일은 저를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참여연대나 노동인권센터 같은 시민단체에 참여해서 활동하고, 언론활동도 꽤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생태의 가치에 대해 제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변호사를 하면서 삶의 영역이 전보다 적어도 2배는 넓어진 것 같아요.

생태농업은 언젠가는 변호사도 그만두고 제가 전적으로 매달릴 일입니다. 지금은 주말에만 가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때가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최근 국민참여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했는데요. 변호사님께서 ‘국민참여재판 1호’ 검사셨더라고요. 국민참여재판이 처음이라서 모든 것이 생소하셨을 것 같은데 당시 진행하셨던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법률 비전문가인 배심원들의 판단은 어떠했고 재판부의 판단과 동일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술을 마시고 망치로 사람의 머리를 때려 다치게 한 살인미수 사건이었습니다. 변호인이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 심신미약만 주장해 큰 쟁점은 없었습니다.

피고인이 술을 마시긴 했지만, 피해자가 있는 여관의 호실을 정확히 찾아가 피해자를 때리고 도망까지 간 점에 비추어 심신미약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배심원이나 재판부 모두 심신미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재판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처음 열리는 것이라 언론의 관심이 컸는데, 제 자랑 같아 쑥스럽긴 하지만, 참여연대의 박근용 사법감시팀장은 2008. 6. 24.자 오마이뉴스(‘나 홀로 변론’ 국선변호사도 지원이 필요해!)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날 재판에서 검사의 노련함이 인상적이었다. 방청하면서 적은 메모지에 ‘여태 본 재판의 검사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적을 정도였다. 이 공판담당 검사는 배심원석 앞 1m 내외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거나, 배심원과 증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주장을 펼쳤다. 배심원들과 눈을 맞추기도 하고 목소리도 올렸다 내렸다 했다. 말 빠르기도 아주 적당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자료를 손에 들고 읽은 적이 거의 없었다. 자기가 할 말을 외우고 나와서 하니 적절한 손동작과 몸동작이 가능했다. 배심원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아 버렸을 것 같았다.”

 

변호사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주로 형사사건을 많이 하는 편인데, 어느 날 아침 아직 열지 않은 사무실 문 앞에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혼할 땐 몰랐는데 아내가 발작증세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또 결혼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친정부모에게 의지를 하고 친정부모가 부부생활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에 괴로움을 호소하며 이혼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담을 이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아내를 폭행한 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접견을 가보니, 그는 핵심에서 벗어난 여러 하소연을 하며 횡설수설하였습니다. 접견이 반복되면서 그의 말하는 태도, 내용 등이 중심이 잡혀가는 것 같았습니다. 공소사실에는 그가 아내를 번쩍 들어 침대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차고 밟았다는 내용이었는데, 아내가 제출한 진단서에는 다리에 멍이 조금 든 것 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말하는 피고인의 행동과 진단서 내용이 거리가 있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정신과 약을 먹으면 맞지 않아도 멍이 생길 수 있다는 근거자료 등을 내면서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1심 재판부는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습니다. 다행히 항소심은 저의 주장을 받아들여 1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하였으나, 대법원은 상해진단서는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며 유죄 취지로 파기하였습니다. 서류재판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유죄가 나왔지만, 제 의뢰인이 재판 과정을 통해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고 당당해진 것은 큰 보람이었습니다.

 

 

오원근 변호사 주요 약력

사법시험 38회, 사법연수원 28기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반부패특별위원회 위원장
청주노동인권센터 운영위원
충북시민재단 이사
충북지방변호사회 공익인권위원장
충북지방노동위원회 조정담당 공익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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