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갔다. 5월은 고혹적인 장미와 함께 왔다가 날카로운 장미의 가시에 찔린 것 같은 부끄러움을 남기고 간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차별 시민 학살이 이루어지고 이에 격분한 무장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지키고 있을 때 친구 몇몇이 수차례 모여 광주로 가자고 모의만 하고 가지 못했던 비겁했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아마 그 당시 광주 소식을 듣던 대부분의 국민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가슴에 아련한 아픔을 남기는 상처이기도 하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 대투쟁과 2018년 촛불시위의 위대한 승리를 견인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만일 1980년 5월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한 용감한 광주시민들이 없었다면 권력에 도취한 집권자들은 1987년 민주화 대투쟁과 2018년 촛불시위 때 무력진압을 1980년의 전두환처럼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흩어지지 않고 의연히 진압군에 맞서다 죽음을 맞이한 1980년 5월의 무장시민군에 겁을 먹은 권력자들은 그 후 시민들의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었던 비겁한 우리들도 위대한 그들을 거울삼아 더 단단해지고 더 결연해졌다.

어쩌면 역사는 용감한 소수와 다수를 이루는 비겁한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한편의 드라마일지도 모른다.

1980년 이후에도 우리 민족의 혼은 살아 있어 용감한 소수는 끊이지 않았다. 나의 주위에도 시위하던 중 잡혀 군대에 강제 징집 되었다가 죽은 후배,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위 향상과 의식화에 헌신한다고 오랜 기간 노동현장에 있다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에서 처진 동기들과 후배들이 많다. 또한 시위하다가 다치거나 끌려가서 수감생활을 하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도 많다.

생명을 잃고 건강을 잃으며 청춘을 바친 본인과 그 가족들의 아픔과 슬픔은 얼마나 클까? 나는 그보다 훨씬 작은 희생에도 좌절하고 절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광주의 비극적 상황과 아버님이 암 투병 끝에 돌아가신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겨우 마음을 잡고 보았던 1981년 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3차 면접 시험에서 시위 전력으로 탈락했을 때 지옥으로 떨어진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다.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5년 만에 다시 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된지도 어언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세속에 젖어 속물이 다 되었고, 소중하고 고마웠던 일을 잊고 살았다.

5월이면 위대했던 나의 선후배들을 꼭 찾아가 소주라도 한 잔 해야겠다는 다짐도 지키지 못했다. 그래도 5월은 항상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래서 소금이 되고 나침반이 되어 준다.

 

 

/진봉헌 변호사

전북회·법무법인 제일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