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되고 민망했던 건 내 업무의 결과물이 낱낱이 공개된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회사원은 그날 무슨 일을 했는지 회사 밖에선 절대로 알 수 없다. 하지만 기자가 그날 쓴 기사는 가족, 친구까지 볼 수 있다. 같은 사안을 타사 기자도 쓸 테니 직접 비교도 된다. 심지어 인터넷에 남은 기사는 포털사이트가 망하지 않는 한 영구히 검색된다. 20년 후 내 자식이 “아빠, 그때 그 기사는 왜 그렇게 썼어? 누구는 이렇게 썼던데”라고 묻는 광경은 제발 오지 않길 빈다.

판사도 업무의 결과물이 판결문으로 보존된다. 다만 기자와 다른 건 평가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법원의 판단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부여받는다.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조항은 사법부 독립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동시에 판결에 대한 시비를 원천 봉쇄하는 용도로도 쓰인다. 판결에 대한 비판은 “사건기록을 전부 보기나 했냐”는 말로 반박된다. 법관처럼 비판하기 어렵고, 비판받지 않는 직업은 사실 드물다.

문제는 그런 이유로 정당성을 부여 받는 시대가 끝나간다는 것이다. 판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그렇다. 정보와 지식이 공개·전파되는 범위는 날로 확장되고,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가 희미해졌으며, 모바일을 통한 평가와 그 확산도 쉬워졌다. “내가 기사를 써도 저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을 대중이 했던 순간, 기자들은 기레기라는 이름을 얻었다. 판사는 이제 막 그 과정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다. 주요 구속영장이 발부 또는 기각된 다음 날 아침에 이를 결정한 판사의 실명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날까지 이미 왔다. 10년 전만 해도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원로 판사는 자신의 판결에 대해 “법리는 양보할 수 없는 명확한 영역이었다”는 언론 인터뷰를 남겼다. 어떤 중견 판사는 사석에서 “대중의 법 감정으로 법관의 이성을 흔드는 건 논리적이냐”고 호소하기도 했다. 경청해야 할 지점은 맞다. 하지만 고민은 남는다. 법리적 완결성에 대한 평가는 해당 법관에게만 맡길 수 있을까. 이를 갖춘 판결은 그 자체로 무오류한 것일까. 판결에 승복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은 우리가 귀를 닫고 무시해도 되는 존재일까.

어느 겨울날, 식사를 마친 밤 10시쯤 판사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야겠다고 했다. 내일 재판 사건기록을 좀 읽어야겠단다. 어차피 다 봤지 않냐는 물음에 그가 말했다. “보는 눈이 많을 텐데 쌈마이 판결문 쓰면 쪽팔리잖아.” 돌이켜 생각하면 무심코 지나쳤던 그 말이 답이었다. 맥주 한잔만 마시고 사건기록을 보러 밤늦게 기어코 사무실로 돌아가는 판사가 있는 한 싸구려 판결은 없을 것이다. 많은 눈이 판결문의 논리를 자유롭게 비판하며 검증할 수 있다면 납득하지 못할 판결은 없을 것이다.

 

 

/문창석 뉴스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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