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째 변호사 일을 하고 있지만 신출내기 변호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일이라는 것이 사무실에서 몸은 퇴근을 해도 머리는 퇴근을 못한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된다.

늘 머리 한쪽 구석에서 온갖 사건들이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떠오르곤 한다. 수년 전 의뢰인 한명이 미국에서 소송을 한 경험을 이야기하던 중, 자기 변호사가 샤워를 하는 중에 사건을 고민했으니 그 시간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더라면서 푸념을 한 적이 있다. 이야기 진위는 모르겠지만 사실 변호사들이라면 은근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 아닌가.

사건 생각을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것은 잠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갑자기 사건 기록들이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막 떠오르는 통에 어느새 잠이 달아나고 번쩍 눈이 뜨이는 경험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어떻게 해야 이 증상이 없어질까.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되도록 일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생각이 나는 건 당연지사. 오히려 다른 생각으로 잊고 싶은 생각을 잠시라도 덮어버리는 게 상책인 듯 싶었다.

한때는 멍하니 텔레비전을 본다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안이 왔는지 화면의 글자도 잘 안 보이는데다 요즘은 빠져들 만큼 재미있는 티비 프로그램도 없어 그 방법도 이제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떠오르는 일 생각을 또 다른 생각이 아닌 노동으로 덮는 방법도 있었다.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꽃을 무더기로 사와서는 한 송이씩 다듬는 것도 꽤 효과가 있었다. 급기야 지난주에는 밤을 사서 다듬기 시작했다. 거실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밤을 깎았다. 혹시나 손을 다칠까봐 밤에서 일초도 눈을 떼지 못하고 껍질을 벗기는데, 정말 무념무상,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그야말로 율(栗)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밤 네 봉지 중 겨우 한 봉지 깎고나니 머리는 맑아졌지만, 웬걸 허리가 욱신거리는데다 밤가위를 쥔 손가락에 물집까지 잡혀있었다. 이 방법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닌 듯하다.

문득 작년에 버스에서 ‘생각버리기 연습’이라는 책광고를 본 게 생각이 났다. 이번에 읽어 볼까싶어 소개글부터 훑어보았다. 내용인즉슨, 우리의 뇌는 자극을 추구하는데,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나치게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에 별 볼일이 없는 반면,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생각은 자극적이라고 느끼기에 뇌가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몰고 가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고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생각병’의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뭔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깨달음이 왔다. ‘아! 내 막연한 불안감은 내 일상이 너무도 편안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구나.’ 나 그저 별일 없이 살고 있구나. 그걸로 충분하다.

 

 

/이경아 변호사

서울회, 법무법인 지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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