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휴즈 대법원장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회심의 펀치 세방을 날렸다. 세개의 핵심 뉴딜입법을 위헌으로 선언한 것이다. ‘마베리 대 매디슨’ 판결에서 확립된 위헌심사권을 대법원이 적극 행사하자, 대통령은 대법관 정원을 늘리는 ‘사법절차개혁법안’으로 우회 압박했다. 왜 ‘법관탄핵’이란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 체이스 대법관 탄핵심판에서 확립된 바, 판결을 이유로 법관을 탄핵할 수 없다는 헌법관습 때문이었다.

새뮤얼 체이스는 메릴랜드 주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연합의회에 참여했지만,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는 불참했다. ‘반연방파’의 입장에서, 시민권의 결여와 주 권한의 약화를 이유로 헌법의 비준에도 반대했다. 그런데 친분이 깊던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홀연 ‘친연방파’로 당파를 바꾸어 신정부에 참여하려 애썼다.

정치적 변신의 결과 대법관에 취임한 체이스는 지금도 인용되는 명 판결을 여럿 남겼지만, 애덤스의 연방당과 제퍼슨의 공화당 간 정쟁의 와중에 전자의 입장을 철저히 옹호했다. 애덤스 대통령을 비판한 언론인들에게 징역과 벌금을 선고했으며, 연방재산세 부과에 항의해 폭동을 일으킨 자들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이에 제퍼슨 측이 격렬히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연방당의 애덤스가 재선에 실패하고 공화당의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정치보복의 화살은 ‘배신의 아이콘’ 체이스 대법관에게 향했다.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 판결에서 마셜 대법원장에게 일격을 당한 하원은 바로 이듬해 체이스 대법관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상원에서 탄핵심판을 주재한 것은 얼마 전 연방당의 책사 알렉산더 해밀턴을 권총결투로 ‘담가버리고’ 살인죄로 기소된 부통령 에런 버였다. 소추인 측은 탄핵이란 본질상 형사기소보다 민사재판에 가깝다며 체이스 대법관의 정치편향적인 판결을 문제 삼았다. 피소추인 측은 헌법상 ‘중죄 또는 경죄’가 요건으로 명시된 이상 기소할 수 없는 행위를 이유로 탄핵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인용정족수 23인을 넘는 25명이 제퍼슨의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그중 상당수는 정파의 이해보다 헌법의 규정을 택했다. “판결을 이유로 법관을 탄핵할 수 없다”는 헌법관습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판결에 대한 불만으로 법관을 탄핵하자는 괴성이 가득하다. 미국에서도 있었던 일이니 그럴 법하다고 할까, 200년도 더된 옛일이 되풀이되니 한심하다고 할까. 미국역사상 가장 당파적이었던 대법관 체이스에 대한 탄핵이 무위로 돌아간 직후, 제퍼슨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썼다. “탄핵이란 다시 시도돼서는 안 될 광대놀음”이었다고. 글월로 못 다할 헌법학도의 변을 이 한 문장으로 대신할까 한다.

 

/신우철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