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31절 100주년을 맞는 해다. 기미년 만세독립운동 이후 우리 현대사는 강압적 통치에서 벗어나 자유를 회복하고 확장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자유의 풍요 속에서 물이나 공기처럼 더이상 자유를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은 참 감사할 일이다.

최근 JTBC 드라마 ‘SKY 캐슬’이 장안의 화제다. 주인공들의 놀라운 연기력도 그렇지만 우리들 마음 속에 내재하는 신분상승과 대물림의 욕망과 자의식을 대학입시라는 제로섬 게임의 경쟁상황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31절을 얘기하다가 조금은 뜬금없이 ‘SKY 캐슬’ 드라마를 언급하는 것은 이 두 사안에 자유의지의 문제가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자가 기본적 인권으로서의 자유를 부정하는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강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후자는 피라미드적 세계관에 의해 내부로부터 억압되는 자유의지와 피폐해진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양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와 연관된다.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이브가 뱀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어기고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원죄(Sin)를 범했는데 그에 따른 징벌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주된 골격이다.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임의로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환경과 함께 자유의지를 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허용하셨던 것일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더라면 성경은 창세기 앞부분에서 끝나고 인류 역사는 에덴동산 이야기로만 채워졌을 것 아닌가?

관점을 달리해 보면 하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걸머질 각오를 하면서까지 우리 인간이 선택의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그만큼 자유의지는 우리 인간성의 핵심가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AI나 로봇이 고도화되어 기능적으로 아무리 인간을 압도한다 하더라도 자유의지 유무는 그들과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남을 것 같다. 비록 상당히 많은 경우 그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우리는 자유의 귀중함을 잊어버리고 기계적으로 상황에 반응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막바지에 도달한 드라마 ‘SKY 캐슬’ 주인공들이 서울의대 합격, 병원장, 3대째 의사가문 등의 목표를 달성하는지 보단 그들이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인지에 더 큰 관심이 간다. 그들이 목표를 이루지 못할지라도 목표 선택과 그 성취를 위한 과정에서 자유를 누리는 용기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박수만 변호사·서울회(대우해양조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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