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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선]판사들이 당해보니
양은경 조선일보 법조전문기자  |  ke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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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호] 승인 2019.01.21  10: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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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의자가 노란 삼각형 안에 서는 순간 플래시 세례가 쏟아진다. 그로부터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기자들은 신경을 곤두세운다. 플래시 터트리는 소리에 정작 그의 목소리는 묻혀버린다. 육성 한 마디라도 담기 위해 그의 앞에는 꽃다발이 아닌 ‘마이크다발’이 놓인다. 전직 대통령, 재벌총수, 고위 정치인의 검찰 출두 광경이다. 영장실질심사가 열리는 법원 풍경도 다르지 않다.

#2. ‘검찰’ 로고가 새겨진 파란색 박스에 물건이 잔뜩 담겨 나온다. 이런 박스가 몇 개씩 쌓인다. 어느 기업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가 통째로 담기기도 한다.

#3. 동이 틀 무렵 조사를 마친 피의자가 검찰 청사를 나선다. 기자들도 쏟아지는 새벽잠을 물리치고 그를 놓칠 새라 따라나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2시간, 이명박 전 대통령은 21시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23시간이었다.

포토라인과 포괄적 압수수색, 밤샘수사는 법조기자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관행이다. 기자들은 수사기관의 관행에 맞춰 스케줄을 잡고 취재를 한다. 기자들에게 익숙하다는 것은 곧 국민들에게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관행들이 ‘판사 수사’로 시험대에 놓이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포토라인을 ‘패싱’하면서 그 앞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잘못을 반성하는 게 피의자의 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판사들의 사무실, 컴퓨터, 이메일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집행되면서 ‘영장의 기재범위’ ‘영장의 효력범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영장에 기재된 키워드 외에는 임의어를 넣어 검색해도 안 된다. 이미 압수수색이 끝난 이메일은 같은 영장으로는 다시 들여다볼 수 없다.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들고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밤샘 수사도 마찬가지다. 잠을 못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진술은 임의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동의를 했더라도 이는 거듭되는 출두로 인한 망신을 피하기 위한 것이므로 아예 효력을 인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쯤 되면 ‘판사들이 당하니 유난 떤다’는 말이 당연히 나온다. 한 변호사는 “그동안 판사들이 이런 현실을 몰랐다는 게 더 기가 막힌다”고 했다. 법정에서 압수수색 문제점을 지적하며 증거능력이 없다는 주장을 숱하게 했지만 좀처럼 받아들여지 않았다고 했다. “컴퓨터를 들고가도 별건수사 걱정에 항의 못하는 심정을 이제는 아실는지”라는 로펌 변호사도 있었다.

그럼에도 ‘당해본’ 판사들이 하는 재판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이번 국면의 소득이다. 실제로 “이제는 검찰조서가 달리 보인다”는 판사들도 적지 않다. 누가 수사를 받더라도 절차를 보장하고 인권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게 형사소송법의 정신이다. 그 ‘누군가’가 이번엔 판사가 된 것이지만, 다음엔 나나 이웃, 가족이 될 수도 있다. 당해본 판사들의 문제 제기를 손가락질할 것인지, 변화의 계기로 삼을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양은경 조선일보 법조전문기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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