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됐다. 새해가 되면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소망과 기대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금년 한해도 여러 일들에서 본의 아니게 과오를 범할 것이라는 점이다.

역사상 유명한 과오들이 많지만 일생을 바쳐서 나사렛 예수를 따르다가 막판에 그를 배신함으로써 그 이전의 희생과 성취들을 무위로 돌려 버린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은 특히 유명하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제자들 중 재정을 담당했던 핵심인물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실 권력자인 유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주고 은 30을 대가로 받는다. 그러나 막상 예수가 체포되자 후회하고 대제사장들을 찾아 가서 예수에게 죄가 없으니 풀어 달라고 하나 거절당한다. 결국 그는 은 30을 대제사장들에게 던져 버리고 나와서 목매어 자살하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가 체포된 후 그를 지켜보기 위해 대제사장의 집안까지 들어 갔다가 그 집 하인이 당신도 저 사람과 한 패 아니냐고 추궁하자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세번 부인하고 도주한 사람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배신은 불과 몇 시간 전 네가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 한 예수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과오이기 때문에 더욱 더 드라마틱하다.

이 두 사람 모두 예수를 버렸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가룟 유다는 배신과 저주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반면 베드로의 경우는 예수의 예언대로 기독교의 제1사도요, 교회의 반석으로 추앙받게 된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초래하였을까?

정의는 과오에 대한 응징을 포함한다. 가룟 유다의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응징으로서 정의 관념에 더 부합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위 두 사람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보면 응징만이 과오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베드로는 배신자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하면서 로마까지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그의 죽음은 그의 세번의 부인과 합쳐지면서 오히려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지를 믿게 하는 중대한 근거가 된다. 예수를 세번 부인할 정도로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가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다면 그것은 그의 메시지가 진실이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베드로의 경우 그의 과오는 그 이후의 행적과 함께 어우러져 더 크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소재가 된 것 같다.

금년 한해도 크고 작은 과오들이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날 것은 분명하다. 바라는 것은 과오가 끝이 아니고 더 큰 성공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 일이다. 금년에 범하게 될 모든 과오들이 결국에는 성공으로 귀결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박수만 변호사·서울회(대우해양조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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