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오십 평생을 따라다닌 양심의 가책이 있다. 1728년 루소가 토리노의 베르첼리스 부인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며, 여주인의 리본을 훔치고 하녀인 마리옹에게 누명을 씌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뜻 없이 단지 부끄러운 마음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한다.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네 번째 산책 중 거짓말에 관한 묵상을 한다. 산책은 어느 철학책에 “거짓말은 표명해야 할 진실을 감추는 것이다”라고 기술된 문구를 음미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정의에 의하면 말할 의무가 없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지 않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반대를 말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앞의 정의에 의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빚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가짜 돈을 주는 것은 그의 돈을 훔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루소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언제 진실을 말할까. 악의 없이 남을 속일 수 있을까. 때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과 거짓을 말하는 것은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진실이 무엇이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다.

그런데 무엇이 진실인가에 따라 한쪽에 이득이 되고 다른 쪽에 손해가 되는 상황 즉 ‘진실의 유용성’이 존재하는 경우 어떻게 대응할까. 침묵할까. 공익의 저울에 달아볼까. 나 자신이 사물의 모든 관계를 모두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가 내린 결론은 사람은 ‘진실의 유용성’에 대해 오판할 수밖에 없으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진실하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움 때문에 거짓말을 한 기억이 있다. “아이를 가져본 일이 있는가요?”라는 질문에 “그런 행복을 가져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5명의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낸 숨기고 싶은 경험이 있다. 앞의 예는 타인에게 해를 끼친 반면 뒤의 예는 아무런 결과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한편 속이려는 의도가 해치려는 의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를 분간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그러므로 내 양심의 목소리에 기준을 두어 참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의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내 말이 참이며, 네 말은 거짓이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개인적으로 증인의 부실한 기억을 떠올리도록 유도하여 재판장의 벼락같은 호통으로 당황한 기억이 있다. 거짓 증언이 될 위험성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루소의 머릿속에서 마리옹 사건이 떠나지 않았다면, 내 기억 속에는 재판장에서의 호통이 살아있다. 루소가 한 작은 거짓말이 의도치 않게 마리옹에게 큰 해를 끼친 것처럼 재판정에서의 의도치 않은 거짓말이 큰 피해를 부를 수 있기에 호통은 필요했던 것이었다.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저작한 이유로 재판에 회부됐던 루소. 그가 오늘의 재판을 관람할 때 거짓말의 종류를 어떻게 분류하고 평가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박상흠 변호사·부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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