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기. 한겨레신문에 2008년 입사했다는 뜻이다. 같은 해 입사한 동기들이 있어서 좋았다. 회사의 방침에 구성원들의 의견을 전할 때 기수별로 의견 수렴을 하니 편했다. 그런데 그뿐이다. 시간이 지나며 19라는 숫자보다는 이름 석자가 들어가는 기사가 나를 규정하고 대표했다. 경력직 채용이 늘어가며 회사에 들어온 경력 직원들과 ‘기수 정리’할 때도 애매모호한 상황이 발생했다. 동료들과 일할 때도 기수가 업무를 좌우하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선후배들에게 기수를 묻지 않게 됐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아래 기수로 갈수록 속으로는 기수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기수 문화의 위력은 여전하다. 언론사 인사의 기준은 여전히 기수다. 연차가 낮은 기수와 높은 기수의 관계는 수직적 성격을 띤다. 다들 알다시피 법조계는 기수 문화가 더 유별나고 강하다. 특히(법조를 출입해 보지 않아서 그런지) 기사에서 법조 인사의 이름 뒤에(사법연수원 ○○기)라고 쓰는 관행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법조계 사람들이나 법조 출입기자가 동석한 술자리에서 대화가 사법연수원 기수를 줄줄 읊는 상황으로 흘러가면 ‘외계어’를 듣는 기분이다.

물론 법조계와 언론 모두 기수를 중요시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기수 문화는 조직 운영만 놓고 봤을 때 아주 효율적이다. ‘검사 동일체’ 원칙도 ‘거악’과 맞서는 수사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사법시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로스쿨 출신 법조인들이 늘어도, 언론사가 경력직 채용 문화로 바뀌어도 기수 문화는 모습만 바뀔 뿐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 업계(언론과 법조계)가 국민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이유 중 하나에 기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기수 문화를 중심으로 ‘업계 선수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동안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 논란으로 법원마저 그 권위가 추락했다. 언론 역시 ‘기레기’란 말을 들은 지 오래다. 검사든 법관이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수사나 재판에 임하고, ‘전관예우’도 사라진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궁금하다. 기자들 역시 자신의 바이라인에 부끄럽지 않은 기사만 마음 놓고 쓰면 사회는 어떻게 바뀔까.

이쯤 되면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화제를 모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문제 의식을 가져와야 할 것 같다.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할 만한 특이한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기수란 무엇인가.

 

 

/이승준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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