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4일 첫눈 폭설을 만끽하면서 최근 개방된 ‘고종의 길’을 걸었다. 영국 대사관 후문에서 당시 러시아 공사관 있었던 곳까지 이어지는 좁고 길지 않은 경로였다. 국왕이 자기 나라 땅에서 상궁이 쓰는 가마를 타고 이런 길로 몰래 빠져 나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서 자신과 선대 왕들의 절대적인 공간이었던 경복궁에 머물지 못하고 일본의 눈을 피해서 빠져 나가는 1896년 2월 11일 고종의 심정을 다소라도 공감할 수 있었다. 약 4개월 전 거기서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변을 겪었으니 얼마나 불안하고 싫었겠는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9일을 살다가 돌아간 곳도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이었다. 고종의 이러한 행동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으로서 온 국민들의 공감을 얻는데 충분하지 않았을까?

위대한 실패자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어니스트 섀클턴이다. 남극점 최초 탐험의 기록을 노르웨이의 아문젠에게 빼앗겼던 그는 남극점을 통과하는 남극대륙 횡단에 도전했다. 보수는 적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 위험이 크다는 광고에도 불구하고 지원한 5000여명 중에서 선정된 27명의 탐험대원들과 함께 1914년 3월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출항한 그는 1915년 1월 남극대륙에 도달했다. 그렇지만 배 주위로 바다가 얼어붙는 바람에 더 이상의 항해가 불가능하여 그 해 10월 배를 포기하고 도보로 대륙횡단을 시도했는데 그것도 얼음들이 쪼개지고 떠 다니게 되면서 결국 이듬해 4월 목표를 포기하고 세척의 구명보트로 무인도였던 엘리펀트 섬으로 철수하게 된다. 대부분의 대원들을 그 섬에 남겨두고 배 한척으로 혹심한 추위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1300km 항해하여 사우스조지아 섬 해안에 도달했지만 배가 있는 항구로 가려면 거기서도 직선거리만 33km 떨어진 섬의 반대편으로 가야 했다. 사투 끝에 섬을 횡단하여 항구에 가서 배를 빌리고 엘리펀트 섬으로 돌아 갔지만 구조작업은 두번이나 실패했다. 그러나 결국 대원들을 전원 구조하여 귀환했다.

섀클턴은 남극점 탐험도 실패했고, 남극대륙횡단도 실패했으니 실패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난관을 견뎌 내면서 대원들 모두와 함께 살아 돌아 왔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은 실패를 압도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모든 위험과 고통에 동참하고 함께 인내하며 살아남았던 대원들의 위대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고종의 경우로 돌아와 보면 비록 국권수호를 위한 그의 몸부림은 바로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기미년 3월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맥이 닿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을 맡았던 김구선생이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한국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을 죽인 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를 살려 준 것도 고종이 아니었던가? 비록 시간은 걸렸지만 일본의 국권탈취에 저항하던 그의 노력이 반드시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이제 고종을 무능하고 실패한 지도자라고 하는데 대하여는 단호하게 “No”라고 말하고 싶다.

 

 

/박수만 변호사·서울회(대우조선해양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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