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좋은 점 한 가지는 아파트 단지 안의 나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풍성한 잎에 훤칠훤칠 하다는 것. 올 가을은 유난히 단풍이 곱다. 옅은 바람 한줄기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 노란비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올 여름 무지막지한 폭염을 맨몸으로 견디어낸 나무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가을을 선물해 준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눈물겹다.

지난 5일 한국여성변호사회가 주최한, 대한민국에서 전문직으로 일하는 여성들이 겪은 성희롱·성폭력 실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올 2월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이후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한 미투 운동의 결정판이자 전문직 여성들이 경험한 성희롱·성폭력 실태, 대한민국의 성 인식과 현주소를 낱낱이 공개한 자리였다. 필자는 그 심포지엄의 발제를 듣던 중 대학 재학시절 동료들, 선후배들과 함께 떠났던 농촌봉사활동에서 경험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25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마치 어제 일처럼 뚜렷하다.

조사에 참여한 직역에는 변호사와 의사, 공인회계사, 기자, 교수, 건축사, 법무사 등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진출해 있는 대부분의 전문직종이 광범위하게 포함됐는데 그 조사결과가 말해주는 대한민국의 현 주소는 너무나 참담하다. 위 심포지엄 자료집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1015명의 전문직 여성들이 크고 작은 성희롱과 성폭력을 경험하였는데 그 건수가 자그마치 4000여건에 이른다(자료집 28쪽). 그들 중 상당수는 이후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다가 결국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대한민국 평균 여성들에 비해 많이 배웠고 똑똑한, 전문 분야의 지식인이라 할 전문직 여성들에게도 이렇게 많은 성희롱과 성폭력이 자행된다면 평범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성폭력 언행들은 어느 정도일까. 생각만으로 현기증이 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희롱이나 성폭력 등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자리에서 가해자에게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법이나 규범에 따른 사후조치를 밟는 등 제대로 대응한 경우는 8.26%에 불과했다는 것이다(자료집 81쪽). 평범한 여성들에 비해서는 더 강단 있을 법 하고, 전문지식과 경험을 가진 전문직 여성들조차 이토록 많은 성폭력 상황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고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다가 결국 직장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 사회 절반의 구성원이 여성임을 생각할 때, 우리 사회의 존립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다.

심포지엄 자료집을 넘기던 중 미투 운동에 대해 언론만 요란했을 뿐 실제로 미투 운동 전과 후의 우리 사회가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친 항변과 가해자들의 인식 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여성들만을 대상으로 이런 조사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불신과 불만의 목소리, 자신이 겪은 피해에 혼자 고통 받다가 주변 사람들, 또는 상급자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힘겹게 털어놓았을 때 주변 사람들이, 상급자들이, 선배들이 보인 반응이 더욱 실망스러웠다는 심층인터뷰 내용이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그가 토해낸 분노와 절망의 한숨에서 나는,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여기까지 왔고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리고 피해자의 대다수를 이루는 여성들이 이 칼럼의 지면 이름처럼 당당하고 평등한 주체로서 행복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가까운 미래를 꿈꾸어 본다. 꿈은 이루어진다 ★.

 

 

/진형혜 변호사·서울회(법무법인 지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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