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상사 소멸시효(消滅時效)를 법전에서 찾을 수가 없다. 조문만 찾아 적으면 해결될 문제인데 고작 소.멸.시.효. 네 글자를 찾지 못해 법전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는 중이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평소 느긋하게 법전을 들여다볼 때와 시험장에서 법전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한자가 안 읽힌다. 직관적으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다. 한자를 한 자씩 뜨문뜨문 속으로 발음하며 읽고 있자니 답답해서 울화가 터질 지경이다.

도대체 시험용법전은 왜 아직도 한자로 되어 있는 걸까. 법률용어는 본래 한자어로 되어 있어 한자로 봐야만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그리고 대다수의 ‘우리’는) 내 이름 석자 정도만 간신히 한자로 적을 수 있는 세대다. 그런 내가 한자 모양을 보고 그 의미를 절로 파악하게 될 리가 없다. 법전에서야 앞뒤 문맥을 통해 한자를 어떻게든 읽어나갈 수 있지만, 그 한자를 따로 떼어놓으면 읽지 못한다. 이런 식의 한자 읽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법률용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편이 나 같은 비법학사 출신들에게는 더 도움이 될 듯하다.

이럴 때가 아니다. 로스쿨에서 첫 시험을 이렇게 망칠 수는 없다. 침착하자. 다시 처음부터 숨은그림찾기 하듯 소멸시효를 찾아본다. 분명 이쪽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눈으로 바쁘게 법전을 뒤지고 있다 보니 또 스멀스멀 불만들이 터져 나온다.

법전 군데군데 있는 개정법률이 눈에 띈다. 눈이 정화되는 듯하다. 생각해보니, 개정법률만 한글로 되어 나오는 것도 웃기는 점이다. 기왕 법전을 한글로 바꾸기로 결정했다면 한꺼번에 다 바꿀 일이지, 무슨 이유로 개정법률에 한하여 한글을 허(許)하는지 모를 일이다. 법전 한글화를 놓고 진보와 보수 세력 사이에 일종의 절충설이 취해진 결과임이 틀림없다.

한자법전을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효용이 있긴 한 걸까. 법률한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서 법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건 아닐 것이다. 만약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한자를 공부할 시간에 법리를 공부하는 편이 더 유용할 것이다.

한글과 한자를 번갈아가며 읽어가는 일은 뇌를 쉽게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한글만 표기해서는 혼란이 있을 수 있는 동음이의어 같은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하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법률한글화에 뜸들일 요량이면, 법학적성시험에 법률한자 과목을 추가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쓸데없는 한탄만 늘어놓다가 시간이 다 갔다. 아무래도 1학년 중간고사는 깔끔하게 망한 것 같다.

 

 

/이창선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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