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관계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과 마음 속 깊이 연결될 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자신의 존재가 확장되는 행복감을 느낀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하나의 커다란 그물망으로 본다. 각각 그물코마다 작은 보석이 달려 있는데 그 보석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비추고 있다고. 인간은 혼자서는 결코 빛날 수 없는 작은 보석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추고 또 내 빛을 받아 서로가 빛나게 된다는 말이다.

고희에 접어들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의사소통만큼 중요한 것이 없음을 크게 깨달았으니 나는 늦깎이. 지난 30년 무심코 서투른 소통을 하면서 변호사로 살아온 것이 아닌지 반조해본다.

상담할 때 내담자의 느낌과 생각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 주는 소통기술과 공감능력이 부족했음을 참회한다. 오히려 상대방을 설득하여 내 뜻대로 조정하려는 의도를 가질 때가 참 많았다.

여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없고 변호사로서 자만심만 있을 뿐이었다. 결과는 소통의 단절이며 관계의 파탄이다.

거북등 껍질처럼 굳어버린 개념 논리에다 시비분별의 사고가 관계를 거칠게 하거나 딱딱하게 만들었다. 곁에 있던 좋은 벗들이 떠나가도 별로 서운한 느낌이 없다.

새로운 관계를 생각하며 안도감을 느끼나 내 주변에 없는 사람을 막연히 기다리거나 그리워하며 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음이 아닐까.

인생길 걸어가는 길목마다 모든 불통의 원인이 다 내게 있을 뿐,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 귀속될 뿐임을 알아차리면서 관계는 봄눈 녹듯 풀린다.

이만큼 살았으니 많은 사람과 사귐을 원치 않는다. 지음(知音)의 벗, 셋이면 족하다. 내 벗이 몇인가 헤아려 보니 술벗(酒友)과 글벗(文友)과 길벗(道伴)이라. 나머지는 그냥 두어라. 이 셋 외에 더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한쪽의 없음으로 허전해서 견딜 수 없는 허물없이 지내는 벗과 소주 한잔이야말로 알맞게 삭아 감칠맛 나는 어리굴젓을 먹는 것과 같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 비위 맞추지 않아도 되고, 약점을 날카롭게 지적해 주면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내 아픔이 벗의 아픔이고 내 기쁨이 벗의 기쁨이 되는 관계라서 오래 발효된 차(茶)처럼 오묘한 맛과 향기가 나온다.

허물없는 벗과 술 한잔이 거친 즐거움이라면, 글벗과 사귐은 미묘한 즐거움이라. 그 향기가 옷에 배어 몇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새가 쉴 때는 반드시 그 쉴 만한 숲을 잘 선택해야 하고 사람이 배울 때 역시 스승과 벗을 잘 선택해야 한다. 고려의 야운 비구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자경문(自警文)’의 한 구절이다.

삶의 길에서 나보다 낫거나 동등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어리석은 자와 우정은 없다. 늘그막에 어질고 지혜로운 벗을 얻었으니 기쁘게 사귀며 그와 함께 가리라.

도움이 되는 벗, 익자삼우(益者三友)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으며 세 벗과 친교를 지속해야하리.

가을빛이 고와서 오름 산행에 나섰다.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우가(五友歌)가 가슴에 꽂힌다. 고산(孤山) 선생은 벗을 수석(水石)과 송죽(松竹)과 월(月)이라 하고 이 다섯 벗밖에 더 둘 필요 없다고 했다.

자연과의 소통은 말과 글이 필요 없다. 단지 바라볼 뿐이다.

 

 

/김승석 변호사·제주회(공증인가 제주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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