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처럼 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늙어가기 때문에 애완(愛玩)보다 반려(伴侶)를 써야 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요즘이다. 열명 중 세명 꼴로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을 만큼, 반려동물을 희망하는 사람들 또한 가까이에서 꽤 찾아볼 수 있다. 나 역시 약 5년째 보리라는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는데, 그 생활과 반려동물을 들이는 데 대해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 테니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려주려 한다.

첫째, 반려동물은 돈과 시간과 손이 모두 많이 든다. 보험이 되지 않아 병원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유명하지만, 목욕과 미용조차 두세 시간이 걸리고, 산책을 다녀올 때마다 발을 씻겨야 할 정도로 시간과 손이 매우 많이 드는 것도 알아야 한다.

또 오래 집을 비울 수 없는 것도 간과할 사항은 아니다. 보리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를 하자, 약한 분리불안에 걸려 아무도 없으면 내내 짖을 때와 가족이 단체로 여행을 갈 때 함께 갈 수 있는 호텔이나 식당을 알아보던 때를 떠올려 보면, 아무렇지 않았던 일상이 어렵거나 조심스러운 도전이 되는 것이다(하지만 보송보송하게 건강한 녀석을 보면 딱히 억울하지는 않다).

둘째, 동화 같은 위로와 소통을 생각하면 안 된다. 보리는 우는 시늉을 하면 와서 핥아준다던지, 눈을 가만히 보며 감정을 나누기는커녕 저 내키는 대로 마중을 나온다. 가끔은 입구에 엎드려 기다려주실 때도 있지만 졸리거나 귀찮을 때에는 꼬리 한올 볼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절대 알 수 없고, 내가 저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저 희망적인 짐작만 할 뿐이고 강요도 할 수 없다. 어디선가 본 구절이 적확하다. “반려동물이 당신의 뜻대로 얌전하지 않듯이, 당신도 부모의 마음에 쏙 드는 자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려동물은 당연히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나 로봇이 아니다. 읽을 수 없지만 생각과 감정이 있고, 함께 살기 위해선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그러나 무심하게 내 배 위에 발을 올리고 조는 녀석은 그것만으로도 제법 좋은 친구처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려’동물은 내가 선택한 인연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어떤 과정을 겪었든 지금 내 곁에 반려동물이 있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의무와 책임, 번거로움과 서운함을 감수하고.

동물은 성장해서 집을 나가거나 알아서 살 수 없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 이 녀석이 삶의 대부분을 나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는 것을, 아주 비장하지는 않더라도 항상 새기고 있어야 한다. 동물은 살아있고 시간은 앞으로 진전하기 때문에 이 선택은 단순히 무르거나 돌릴 수 없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심각하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우리집은 보리가 오고 나서 많은 좋은 변화를 겪었고, 보리는 이 모든 어려움도 어렵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사랑스러운 막내가 됐다.

이 과정이 순탄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각자 다르다. 선택했다고 해서-모든 삶이 그렇듯-우리는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이 작은 녀석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내가 소유할 수 없으며 시혜적이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도 여전히 반려동물을 원한다면, 손을 내밀 때 기꺼이 달려오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김충희 변호사·부산회(법무법인 동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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