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법원 내부에서 쉽사리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단어가 있다. ‘역지사지’ 좀 더 풀어쓰자면 ‘당해보니 비로소 알겠다’는 얘기다. 사법농단 의혹으로 조직 전체가 검찰 수사에 시달리게 된 형국 속에서 나도는 자조 섞인 표현이다.

이는 법원이 외부 비판에 하릴없이 난타당하는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 사법농단 사건의 압수수색영장 기각률이 89%에 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검찰 수사가 4개월이 넘어가는 동안 법원이 가장 많이 듣는 조롱은 ‘제 식구 감싸기’다.

이렇다보니 법원으로선 공공연하게 ‘당해보니 알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는 처지다. 판사들은 ‘법원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 때문에 영장을 기각하는 게 결코 아니라고 강조한다. A 판사는 “최소한의 범죄혐의가 소명되지도 않은 채 ‘일단 뭐든 봐보겠다’는 식의 영장을 어떻게 내줄 수 있겠느냐”고 설명한다. B 판사도 “법리적 판단에 따라 기각하는 것”이라고 호소한다. 이들은 그러나 “그동안 검찰 수사의 그늘진 면을 모른 척했던 법원이 이제 와서 내가 당해보니 알겠다며 무엇을 말한다 한들 구차해진다”고 더 이상 말을 아낀다.

사실 과거에도 압수수색영장은 구속영장과 더불어 이슈로 부각되고는 했다. 압수수색영장 기각률이 10%를 밑돌면서 ‘법원이 수사 편의를 봐준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다. 이는 불구속 재판이란 형사 대원칙에 따라 기각률이 30%대를 넘나드는 구속영장과 비교되기도 했다.

피의자와 가족들에 대한 인권침해는 인신구속 못지않게 압수수색 과정에서도 일어난다. 모든 영장의 발부와 집행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검찰의 고질적 관행인 별건 수사는 압수수색을 남발하며 이것저것 다 털어보다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더욱 엄격해야 한다.

검찰 고위직 출신 관계자는 사법농단 수사가 본격화하기 전인 올해 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구속영장은 법원에 의해 어느 정도 견제가 이뤄지고 있는데, 압수수색영장은 사실상 ‘법원 패싱’처럼 너무 쉽게 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당해보니 알겠다는 법원 내부의 자성이 나쁜 수사관행에 제동을 걸 수 있다면 국민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기회다. 기계적인 영장 발부가 신중해지는 것만이 아니다. 판사들 사이에선 검찰 조사실에서 작성된 조서에 편승하던 버릇을 버리고 진정한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다짐도 나온다.

법원이 쑥대밭이 되는 사이 검찰은 개혁대상 1순위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검찰에서 ‘당해보니 알겠다’는 소리가 나올 날이 있을까. 여전히 직접수사권, 수사지휘권, 독점적 기소권을 양손에 움켜쥔 검찰에게 역지사지는 요원해 보인다.

 

/김리안 문화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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