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헌법기관인 법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바닥에 이르렀다는 기사를 언론에서 자주 접하게 됩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망스럽기도 하고 법관은 아니지만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법조계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나는 변호사로서의 삶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시대에 남과 북의 긴장 완화와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조국에 대한 관심은 전쟁 위험이 사라지고 백성이 풍요롭게 사는 한반도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기우를 만들어 냅니다.

각양각색의 원초적 먹방(출연자들이 음식을 먹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대세인 가운데, 출연자들이 그리스 아테네와 이탈리아 피렌체 등을 방문하며 인문학과 관련된 대화를 자유롭게 풀어가는 프로그램인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3에 대한 관심은 나의 무지에 대한 반성과 함께 ‘그림의 묘미는 잘 안다는 데 있으며, 잘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된다’ 는 조선시대 어느 화첩에 담긴 글을 새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무지에 대한 반성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과 ‘크리톤’을 놓아 둔 위치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합니다.

나른한 주말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 문득 눈에 띈 베란다 한 편에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바람 빠진 타이어에 의지한 채 녹슬어 가는 자전거에 대한 관심은 푸른 가을 하늘 아래에서 에너지가 넘치는 자녀와 함께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활기찬 주말로 변화됩니다.

두서없이 저의 관심과 관심이 가져 온 변화들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뒤죽박죽인 제 삶의 모양 그대로를 닮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질서한 제 삶 속에서 변호사님들과 함께 느껴보고자 한 것은 우리를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이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재료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국의 논리학자, 철학자, 수학자, 사회사상가인 버트란드 러셀은 저서 <행복의 정복(The Conquest of Happiness)>에서 행복한 삶에 대해 이렇게 조언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자신에게 공급되는 원료를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잘 혼합할 수 있는 신비한 기계다. 하지만 외부 세계로부터 원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마음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또한 마음은 소시지 기계와는 달리 스스로 원료를 손에 넣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사건들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때에만 비로소 경험이 된다. 우리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건들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관심이 내면으로 쏠려 있는 사람은 자신의 관심에 값할 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관심이 외부로 향하고 있는 사람은 어쩌다가 한 번씩 자신의 영혼으로 눈을 돌릴 때면, 자신의 내면이 대단히 다채롭고 재미있는 종류의 원료들을 분류하고 재결합하여, 아름다운 혹은 발전적인 조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얼마 전 추석 명절이 지났지만 아직 2018년 한 해는 무려 석달이 남아 있습니다. 변호사님들 모두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삶의 원료를 풍성하게 하는 알찬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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