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란 세계 여러 나라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활발히 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 무역의 확대로 가속화 되었는데 이를 통해 현대인들은 세계 각국의 브랜드 상품을 구입하는 것에 친숙함을 느끼고, 인터넷을 통해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빠른 속도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가 ‘세계화’라는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개념을 새삼스레 확인한 이유는 생각보다 우리나라 국민의 마음속에 ‘세계화’에 대한 벽이 있고, 자신과 다름으로 인한 두려움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어쩌면 자연스러운) 거부반응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유입된 예멘 난민들의 수용 여부가 연일 뜨거운 감자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난민의 수용을 반대하는 취지의 청원에 약 71만 명이 참여한 상태이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범죄는 일단 예멘 난민에 의한 것은 아닌지를 의심받았는데, 이러한 회의적인 시각은 난민들이 여러 범죄를 유발한다는 ‘괴소문’과 함께 이슬람 혐오로까지 확대되는 실정이다. 난민에 대한 거부반응의 기저에는 그들이 우리 공동체와 융화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로서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그들을 수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기한 것이라 본다.

한편, 한국은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해외에 거주하는 이민자들이 많은 나라인데, 해외 동포들이 그 곳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자리 잡은 정도에 비하면 사실 그 정착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이는 그 이민의 본격적인 시작이 1900년대에 한국이 일제 강점기 시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이루어 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지금의 난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였던 바, 만약, 세계가 자신들과 문화가 다르거나,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을 배척하고 수용하지 않았다면 세계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

원래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배척하고 그에 대해 배타적이기는 쉽지만 이를 수용하는 것은 한 번 더 고민이 필요한 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 거부감이 들더라도 이를 잘 생각하고 곱씹어 봐야하는데, 만약 막연한 거부감으로 누군가를 외면한다면 우리 역시 막연한 거부감으로 다른 이에게 외면당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앞으로 이슬람 문화권과의 일체의 교류를 포기할 것인지, 500여명의 난민에 흔들릴 정도로 외부에 폐쇄적이었는지,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조선의 쇄국정책이 현대에서 되풀이 되려는 것은 아닌 지 곱씹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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