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책상에 앉아 오후에 사전투표를 한 후 원고를 써야겠다 계획하고 무엇에 대해 쓸까 고민 하고 있는 참에 우리 지방회 사무국에서 보내온 팩스를 받았다.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 시국선언이 사법부 개혁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촛불집회나 미투운동은 얼마나 사회변혁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이내 사회변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시민혁명 및 그 이후의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변혁은 평등하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시민의 열망과 피를 자양분 삼아 이뤄졌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사회변혁은 이런 고전적 의미의 사회변혁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에 직면해 있다. 그 첫 출발점이 촛불집회이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굳이 ‘투사적 행동’을 하지 않고 ‘투사적 선언’만으로도 정당성을 입증 받을 수 있고 변혁 가능한 사회가 됐다는 점에서, 필자는 촛불집회를 우리 사회변혁 패러다임이 바뀐 시발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재 각 분야의 미투선언으로 우리 사회가 변혁돼 가는 것을 본다. 어쩌면 이미 사회의 변혁된 부분을 확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과거 우리 사회가 독립투사나 민주투사의 희생을 바탕으로 변혁을 이뤄낸 것과는 매우 달라 격세지감이 든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이 필요한 경우와 말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다. 두 경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의 구성원은 잘못된 것을 인식해도 스스로 고치려고 하는 것을 주저하지만 후자의 구성원은 잘못된 것을 인식하면 스스로 고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정의로운 사회임은 말할 나위 없다.

공자는 극기복례로써 요순시대의 이상향을 추구하였지만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인터넷, SNS 및 인공지능 기술에 힘입어 ‘선언’만으로도 충분히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인간성은 변화하지 않으며 국민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개, 돼지’ 정도다 생각하고 권한을 남용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현재 도래한 것이다.

세상에 자기를 맞추려고 하는 사람과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까?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은 대부분 광기어린 삶으로 인류에 해악을 끼쳤지만, 이들 중에도 분명 해악을 끼치기보다는 세상을 조금씩이나마 새롭게 변화시키는데 기여를 한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어리석기 짝이 없고 우직해 보이는 사람에 의해 우리는 감동을 받고 결국 사회는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불의한 사회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것은 분명 칭찬 받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데 진일보한 것이 세상이라면, 그런 사람은 오히려 불의이며 결국 타의에 의한 청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불상을 머리에 이고 옮기던 사람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에게 경배를 드리자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착각하고 자기는 고작 불상이나 옮기는 위인이 아니라고 불상을 내동댕이친다면, 세상은 그 ‘위인’에게 더 이상 경배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한 불상을 내동댕이쳐 훼손했다고 대가를 치르게 한다.

위 시국선언문을 읽어 보니 공감이 가는 당연한 내용이다. 제목대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것이다. 시대의 갈림길에서 이런 선언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겠지만, 앞으로는 이런 시국선언이 필요 없는 사법부로 거듭나길 바란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