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지구 종말시계(Dooms Day Clock)의 분침은 한반도에서 참혹한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52년과 같은 자정 2분 전으로 맞춰졌다. 각 국의 군사력 증강, 무력 분쟁, 소형무기에서부터 대량파괴무기의 확산, 예측 불가능한 테러와 여기에 규범과 제도를 훨씬 앞질러 진화하는 기술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위협이 등장함에 따라 국제안보 환경은 나날이 엄중함을 더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군축과 비확산, 그리고 무기 통제를 위한 다자 외교가 국제 안보와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의 중심에 다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군축 전문가들이 집결해 있는 제네바의 대표적인 군축 포럼이지만, 지난 20여년간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긴 잠에 빠져있는 제네바 군축회의(Conference on Disarmament, CD)의 내실있는 역할에 대한 기대와 압력으로 작용해왔다. 그리고 지속적인 대내외적 추동에 따라, 올해 초 CD 내 5개 보조기구(subsidiary bodies)가 설치되었으며, 5월 2차 회기부터 CD 핵심의제(△핵군축 △핵전쟁 방지 △외기권 군비경쟁 방지 △소극적 안전보장 △새로운 유형의 대량살상무기, 포괄적 군축계획, 군비 투명성 및 새롭게 부상하는 현안 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CD 보조기구 논의의 목적은 △각 사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 속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심도 있는 기술적 협의를 통해 합의의 범위를 넓혀 △조약 협상 등 각 사안을 다루어 나갈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1978년 제1차 유엔군축특총에서 유일한 다자군축 협상포럼으로 설치된 CD에는 현재 1996년 동시 가입한 남·북한을 포함, 5개 핵보유국과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 시리아 등 전 세계 65개 주요 플레이어들이 참가하여 매년 24주간 주요 군축과 안보 현안을 논의한다.

CD 본연의 목표는 다자군축협정문의 교섭과 성안이지만, 1996년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체결 이후 핵군축 문제 등을 둘러싼 대립으로 인한 정체가 22년간 계속되던 중이었기에, 이번 보조기구 논의 개시에 65개 회원국 모두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부 성급한 호사가들은 ‘잠자는 제네바 공주’가 깨어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언급하기도 하고, 일부 좀 더 현실적인 시각에서는 입장차를 단번에 극복한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지나친 욕심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고 주목해야 할 사실은 CD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속도와 보폭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자외교의 본산인 제네바 부임 후 지난 9개월간 체득하게 된 중요한 사실은 오랜 정체와 교착이 지속되는 이면에는 그만큼의 거센 대립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 대립을 선뜻 서둘러 봉합하려 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지만, 그 뒤에서는 조금씩 서로를 끌어당기는 노력이 끈질기게 계속된다. 같은 편에 서 있다 갑자기 대척점에 서기도 하고, 지난주까지는 서로 말도 섞을 것 같지 않다가 오늘은 비슷한 입장을 강변한기도 한다.

이 거대한 담론과 보이지 않는 파도 속에서 한편의 또 다른 격랑 속에 있는 우리를 어떻게 내밀고, 당겨야 하는지를 그 어느 때보다 치열히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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