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대륙법계와 영미법계는 그 실체법적인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데 그에 못지 않게 절차적인 면에서도 크게 다르다. 상사 관련 법들은 조약이나 모델법을 통하여 국제적인 통일을 이루어 나가고 있으므로 양 법계의 법률들이 매우 비슷해지고 있으나 절차법은 아직 통일의 움직임이 별로 없다. 그 결과 영미법 국가에서 소송을 진행할 때 우리와 크게 다른 점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것이 증거제출절차[미국에서는 이를 디스커버리(discovery)라고 부르며 영국은 디스클로저(disclosure)라고 칭한다]라고 볼 수 있다. 한쪽 당사자가 중요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소위 증거의 편중 현상) 이를 소송절차에 제대로 제출하도록 하는 것이 사법 정의의 실현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국에서 소송을 할 때 비록 소송법에 문서제출명령제도가 있으나 이는 당사자 신청을 전제로 하며, 설사 피신청 당사자가 제대로 문서를 제출하지 않아도 법원은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것에 매우 소극적이어서 답답한 경우를 자주 겪는다. 그러나 영미법 국가에서 소송을 할 때는 오히려 그 철저함에 당황할 정도다. 그 특징을 살펴 보면 먼저 양 당사자는 일반적인 소송 의무로서 상대방에게 증명책임의 존부, 자신에게 유불리 여부에 불문하고 소송과 관련성(relevancy) 있는 모든 증거를 공개해야 하며, 만일 이에 불응할 때는 입증간주뿐만 아니라 무변론 판결 및 법정모독죄까지 법원의 강력한 제재가 따른다. 그뿐 아니라 근자의 문서 저장 기술 변화에 따라 전자 문서의 개시를 위한 법제도 정비까지 완비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포렌식 서비스 업체의 기술도 확보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퀄컴, 브로드컴 등 특허 소송에서 증거개시 절차를 어떻게 진행하였는지 여부가 소송 결과를 좌우한 것을 보더라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또 소송절차상 원칙적으로 증거 개시 절차 기간 내에서만 증거를 제출할 수 있기 때문에 증거개시 절차가 종료되면 당사자들은 제출된 증거들을 토대로 자신의 사건에 대한 충분한 평가 후 승소 전망을 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당사자간 합의를 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는 장점도 생기게 된다. 비록 영미의 증거 개시 절차가 지나치게 변호사 비용을 많이 발생시킨다는 비판이 있지만 소송의 진실 발견, 원만한 합의 유도 등 관점에서 본다면 큰 장점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문서제출명령 제도의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여 문서목록제출명령 및 문서제시명령을 신설하는 등 이를 확장 강화하는 방향으로 관련 조항을 개정한 바가 있으나 문서의 부제출에 대한 제재가 입법적으로 미온적이며 재판부의 수동적인 제재 적용 등 이유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형편이다. 최근 대법원은 분쟁을 조기에 해결하거나 하급심에서 종결할 수 있도록 오로지 증거 수집을 목적으로 증인신문, 검증, 감정, 문서제출명령을 독립된 절차로 도입하는 내용의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논의하고 있음을 공개하여 조만간 제도 개선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는 영미법계 디스커버리 제도보다는 독일의 독립적 증거조사 제도에 흡사한 것이지만 향후 증거제출 절차의 개선을 예고하는 것이어서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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