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협 “항소심의 사후심화는 사실상 2심제 운용, 법원 편의 위한 국민 권리 박탈”
1심 충실화 위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법관 충원 등이 선논의돼야 한다고 주장

변호사 87%가 항소심을 사후심화하는 데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김현)는 “법원이 항소심을 사후심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면서 “이는 국민 권익 보호와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방안이 아니라 법원 편의주의에 입각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항소심을 사후심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사실심 단계인 항소심을 법리만 심리하는 사후심처럼 운영함으로써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재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1심 판단을 무조건 존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1심 재판 충실화를 위한 노력도 병행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변협이 지난달 18일부터 이달 4일까지 실시한 재판제도 개선을 위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변호사 87%는 항소심을 사후심화하는 데 반대한다. 사실심을 1심만으로 제한하면 사실심이 충실하게 진행될지 여부가 불투명하며, 사실상 2심제가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항소심의 사후심화에 찬성하는 목소리도 소수 있다. 재판을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아울러 상대방이 고의적으로 재판이 지연시키는 일을 예방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소심을 사후심화하는 데 대다수 변호사가 우려를 표하는 이유는 실체적 진실 발견과 형사피고인 보호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항소심이 사후심화 되면, 1심 판결에서 제출된 소송자료만을 기초로 심리를 진행하게 된다. 새로운 증거나 증인 채택도 되지 않고, 공소장 변경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1심에서 철저하게 심리가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 무고한 사람을 구제할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다.

이미 항소심이 사후심처럼 운영된다고 생각하는 변호사도 많다. 증거 또는 증인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원심을 유지하려는 경향 또한 뚜렷하다고 보는 변호사도 많다.

A 변호사는 “항소인이 증거신청을 하면 ‘왜 1심에서 하지 않았느냐’면서 증거신청을 기각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면서 “특히 추가증언이 필요해 동일 증인을 다시 신문신청하면 이를 채택받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털어놨다.

B 변호사도 “전관비리와도 결부된 1심에서 심리미진에 따른 사실오인과 법리오해가 명백했으나, 항소심에서는 아예 소송지휘 자체를 거부하다시피 하면서 신속히 심리를 종결하고 일방적으로 전관에게 유리한 판결을 선고했다”면서 “이러한 경우는 변호사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사례 유형”이라고 밝혔다.

이런 현상은 대법원이 항소심을 사후심화하겠다는 정책을 꾸준히 밀고 나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C 변호사는 “항소심이 존재하는 이유를 망각하고 1심 결론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판사가 있다”면서 “대법원이 정책으로 계속해서 밀고 나가니 일선 판사들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D 변호사도 “재판장이 사후심으로 운영하라는 지침 때문에 사실에 대한 다툼에 대해서 다루지 않고 1심에서 인정한 사실을 기초로 재판을 진행하려고 한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대법원이 말하는 1심 재판 충실화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F 변호사는 “1심 충실화란 이름으로 항소심에서 항소를 기각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런 경우 우리나라 법원은 사실상 1심제가 돼 버릴 수 있다”고 토로했다.

변협은 1심 충실화를 선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변협은 “사실심인 항소심도 사후심처럼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1심이 충실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추진하면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밝혔다.

1심을 충실화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 도입이 거론되고 있다. 이 제도는 재판 전 당사자 양측이 가진 증거 등을 서로 공개함으로써 당사자가 사실적 정보를 충분히 검토해 쟁점을 명료화할 수 있다. 또한 당사자가 자료 공개 책임을 지므로 일반인이 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할 때 증거 확보를 용이하게 할 수 있다. 소송절차를 간소화할 뿐 아니라 소송비용 절감 효과도 있어 미국에서는 1938년 도입했다.

또 미국에서는 디지털 기술, 정보통신 기술 등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2006년 민사소송 절차에 전자증거에 대한 증거개시제도인 이디스버커리(eDiscovery)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영국, 캐나다, 독일, 일본, 호주 등에서도 각국 사정에 맞게 이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움직임은 있지만 아직 활성화된 상황은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추진을 시작했다. 손해배상소송 과정에서 법원이 피해액 산정 등을 이유로 기업에 자료 제출을 요구할 경우 기업이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의무를 지운다는 것이다. 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에서 피해자의 증거확보를 돕기 위해서다.

법관을 충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변협은 “법원 자원과 시간 투입을 줄이는 효율적 운영을 위해 국민 권리를 박탈하기보다는 법관을 충원해서 1심을 보다 충실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관 업무량은 과다한 수준이다. 2016년 법관 1인당 처리한 사건 수는 대법원 3317.6건, 고등법원 114.5건, 지방법원 575.2건이다. 이처럼 1심과 항소심이 모두 진행되는 지방법원에서 법관이 하루에 2건 이상 사건을 처리하고 있는데, 법관 증원 없이 1심을 충실화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다만 변협은 대법관과 관련, 상고법원 설치도 고려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현 협회장은 “원칙적으로는 대법관 수 증원을 해야 하지만 이것이 어렵다면 상고법원 설치 방안도 논의해봐야 한다”면서 “고등법원 소재지에 상고법원이 설치되면 송무 사건이 증대돼 지방회원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관련 사안은 회원 의견을 수렴할 것”이라고 밝혔다.

변협은 부실재판 논란 해소와 신속한 재판진행을 위한 법관 및 대법관 증원에 관한 설문조사를 지난 24일부터 실시하고 있다. 설문조사는 오는 31일까지 변협 공문 제1175호를 통해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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