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일은 변호사 개업 30주년 되는 날이다. 지인들과 함께 축하 이벤트라도 해야 되는데 진주에 있는 한 병원에서 척추 관 협착증 내시경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라 침상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옛일을 되돌아본다.

관직을 받아 외출했던 반년의 시간을 제외하곤 여러 사람들의 많은 은혜를 입고 무탈하게 30년을 버티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사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흔적을 남기고 기억을 저장한다. 누군가는 기억이란 바로 잃어버린 사물에 대한 향수요, 귀향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회상(回想)에 빠지자 기억의 잎사귀들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는 듯 느껴진다. 개중에는 불쾌하고 슬픈 것도 있으나 달콤하고 기분 좋은 것도 있다.

고교 동문 선배님으로부터 받은 개업 축하 화분을 30년 간 고스란히 보존하며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그 어르신네는 제주의 정·재계의 거목과 같은 분이다. 정기 모임이 있어서 매년 한두번을 뵙게 되는데 그때마다 화분은 얘깃거리이다.

자연 수형의 나뭇등걸에 난초과 다년생 화초인 대명석곡(大明石斛, Dendrobium speciosum)과 긴기아남(Dendrobium kingianum)을 붙인 목부작(木附作)으로 높이 0.8m 두께 0.5m 분재이다.

대명석곡은 호주가 자생지이나 일본에서 개량되어 얻은 종으로 1∼5월 사이 난향이 짙은 흰색 꽃을 피운다. 긴기아남은 이른 봄에 흰색과 보라색 꽃을 피우는 호주가 자생지인 난이다.

겨울엔 해가 비스듬히 비춰 남쪽 거실에 일조량이 늘면서 화분에서는 봄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긴기아남은 매해 꽃을 피우나 대명석곡은 단 한번만 꽃을 피웠다. 대명은 다른 석곡에 비해 줄기도 굵고 크며 꽃이 매우 화려하게 핀다.

매년 분갈이를 해 주면서 정성껏 가꾸어야 다문다문 꽃을 볼 수 있을 터인데 게을러서 30년 간 한번 분갈이 해 준 적이 없다. 내 무관심에 아랑곳없이 나름대로 30년의 존재감을 키웠으니 볼수록 대견스럽다.

단양의 관기(官妓) 두향에게 받은 매화 화분을 가까이 두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20여년 간 두향 보듯 애지중지했던 퇴계 이황 선생의 지순한 사랑 엿보기가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별세 직전에 남긴 “매화 분재에 물을 주라”라는 선생의 유훈을 깊이 새겨 본다.

취임식이나 개업식의 축하 화분은 꽃이 지고 관리가 소홀해지면 죽어 버리기 십상이다. 매양 피는 꽃이 다 그게 그거겠지만 시각의식이 소멸하면 정표를 잃음과 같음에랴.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축하해 주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돕는 게 우리네 정이다. 그 각별한 마음을 담은 조그만 정표들이 내 책상 서랍에 기나긴 잠을 자고 있다.

나이 듦 탓인가. 은혜를 잊고 살고 있다. 이 몸이 더 고목이 되기 전에 이 화분을 보듯 하나하나 정표를 되새기며 감사의 뜻을 회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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