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자주 갔던 놀이공원에 어느 날 ‘지구마을’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놀이기구가 개장했다. 외관도 거창했지만 새로 생긴 시설인 만큼 호기심이 폭발하여, 넘치는 대기인원 틈에서 한참을 지루하게 줄선 끝에 의기양양하게 상기되어 입장했다. 아기자기한 보트를 타면 전 세계 각국의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들이 역시 그 나라 전통음악과 배경장치 속에서 깜찍발랄한 춤을 추는 걸 구경하며 수로를 따라 세계일주를 하고 나오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나라에 저렇게나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사는구나 넋 놓고 구경하며 어린 마음에 그 잔영이 한동안 잊히질 않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스위스 제네바는 30개가 넘는 국제기구와 180개국 가까운 각국 대표부와 수백개 비정부단체가 모여 북적이는 국제도시이다. 유엔본부 건물 정면에는 회원국별 국기가 일렬로 도열해 장관을 이루며 밤낮없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다. 일대 국제기구 회의실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의 국제회의가 개최되고, 무역, 개발, 인권, 군축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세계적인 현안을 놓고 회원국 대표별로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조하며 이합집산에 분주하다. 그 중에서도 자유무역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1995년 1월 1일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20년 이상의 연륜을 쌓아올리며 명실상부한 세계무역질서의 무게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 GATT 체제가 갖지 못한, 국가 간 무역통상에 관한 분쟁해결시스템을 공고히 함으로써 국제무역에 관한 한 최종 사법기구로서의 역할도 성공적으로 수행해 오고 있다.

그런 WTO가 요즘 잔뜩 토라진 모양새의 미국으로 인해 시끌시끌하다.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외치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등 무역구제조치가 ‘폭격’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동네방네 떨어지고 있고, 분쟁해결절차의 상소심 역할을 수행하는 상소기구 총 7인 정원 중 절반 가까운 3인의 임기만료로 인한 공석에 대해서도 그 후임자 선출에 전혀 협조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팔짱 끼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다른 회원국들은 작금의 WTO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자국의 이해득실에 가장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온 신경을 집중하며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어린 시절 본 ‘지구마을’은 화사한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들의 노래와 춤이 한 순간도 끊이지 않은 동화 같은 축제의 장이었다. 모두가 상생하고 조화를 이루는 곳. 제네바라는 국제무대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치열하고 적나라한 진짜 지구마을의 모습은 참으로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고단하다. 돌이켜 보니 나는 놀이공원 속 지구마을을 보트 타고 ‘관조’했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볼 때는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다 희극이라는데, 그 때 쉼 없이 발 구르고 손뼉 치며 웃던 그 인형들도 사실은 고달팠을까. 요즘에서야 비로소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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