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 수상하다”는 말과 “믿을 사람 하나없다”는 말이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미투(#MeToo) 운동’이 한창이다. 피해사실을 살펴보며, 여성이기에 감수하고 침묵하여야 했던 불쾌하고 두려운 경험을 용기내어 광장에 이야기하기까지 얼마만큼의 고민과 다짐이 있었을지, 같은 여성으로서 차마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고등학교 시절, 미국에서는 9·11 테러가 발생했고, 이후 미국의 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나는 모두가 나와 비슷한 입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의 찬반에 대해 가족구성원의 의견 차이는 날이 갈수록 커졌고, 아버지와 나는 당시 일반사회 교과목의 힘을 빌려 설문지가 2만여부에 가까워지도록 설문조사를 하게 되었다. 다른 과목 성적을 포기한 채 매달린 설문 결과를 보니, 내 생각과는 정 반대로 67%가 조금 넘는 사람들이 위 전쟁에 찬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담임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것이 시대의합리라고. 절대 다수가 내리는 시대의 명령이니 따라야 한다고.

오늘날 다시 ‘시대의 합리’라는 말이 떠오른다. ‘미투 운동’의 피해자가 겪은 일을 살펴보니 최근부터 불과 20여년 전의 일이다. 민주화 항쟁이 마무리되고, 페미니즘과 몸담론이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던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이야기들인데 민주적이고 깨어있다고 생각한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도대체 얼마만큼의 성범죄가 침묵속에 숨겨져 왔는지 생각할수록 몸이 떨린다. 그리고 그 와중에 변호사인 대학선배가 ‘미투 운동’에 동참했다는 소식을 들게 되었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

혹자는 피해자를 탓하며 왜 이제야 피해사실을 밝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성공하려면 다들 그렇게 훈련하고 단련된다는 극단의 내부사정, 연예계는 원래 그렇다는 비논리적 발상, 피해사실의 발설은 곧 권위에의 도전이거나 공동체의식이 없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바라보는 눈초리 등을 모두 이겨낼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성폭력 피해자를 변호해보면 피해자는 진술을 하며 눈이 풀리고, 땀을 비오듯 쏟아낸다. 발작을 일으키거나 혀의 마비증세가 오는 이도 있다. 그 때문에 피해자를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붉힌 적도 여러번인데 여기에 더하여 피해자과 위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까지 감내하여야 피해사실이 진술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피해사실을 즉각 밝히라는 요구는 매우 잔인한 요구인 것이다.

변호사가 되고도, 여변호사의 바지복장에 대해 무슨 짓인 줄 모르겠다고 말했던 노신사가 있었고, 내 얼굴을 자세히 보지도 않았으면서 동안이라 판사에게 먹히겠다고 이야기한 무례한 의뢰인도 있었다. 이러한 발언들은 지극히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이요,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화를 내기보다는 그저 평정을 찾는 것이 내 고객에 대한 미덕이라 여기고 생긋이 웃어보였다. ‘나는 프로니까’라는 되지도 않는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

과연 시대의 합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성별을 불문하고 합리가 진실로 합리인지 돌이켜 생각해 보지 않는 세상에 참으로 오래토록 살고 있었다. 사회의 젠더는 어쩔 수 없이 남성에 가까웠고 그렇기에 여성은 그런 일을 한두번 당할 수 있다는 분위기, 남자가 그럴 수도 있다는 편협한 생각, 무엇보다 피해자를 폭로자라고 둔갑시켜 입막음하려고 했던 그 시대의 합리가 오늘날 이토록 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것은 아닐까. 법을 지척에서 다루는 나도 성희롱 발언에 항의 하나 못하는 대처능력을 가지고 있다. 권위 아래의 여성들이 어떠할지 마음이 아린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