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먹거리를 위해 양식업이 성행한다. 그러나 과거 조금이나마 배고픔을 해소하고자 황소개구리, 베스나 블루길 같은 외래종을 경쟁적으로 들여놓았더니 호수와 저수지는 생태계균형을 잃어버렸다. 순환에 한 역할을 하던 물속의 곤충은 물론 토착 어류와 개구리 심지어 뱀까지 위협을 받았다. 자정력이 무너져 물이 썩자 그 물을 상수원으로 하는 곳에서는 소독약의 양을 늘려야했다. 소독약이 늘자 사람들은 수돗물을 허드렛물로 쓰고, 먹는 물은 생수공장에서 플라스틱 통에 담아 파는 물이나 정수기로 해결한다. 생수공장이 들어서면서 골짜기가 마르자 동물들이 숲에서 사라지고 동물이 씨앗을 공급하지 못하자 숲은 황폐해지고 만다. 숲이 황폐해지면 사람들의 삶도 황폐해진다. 법률적인 문제와 달리 환경은 인과관계를 무한으로 확장한다.

1955년 어느날,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의 마을은 낙하산으로 뒤덮였다. 낙하산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씩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쥐가 들끓는 마을을 구하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고양이 공수’ 작전이었다. 그 마을의 고양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먼저 인도네시아 정부가 보르네오 섬의 말라리아 퇴치를 위하여 ‘디디티(DDT)’를 사용하였다. 그 ‘디디티’의 약효는 좋았다. 그러나 모기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진딧물이나 다른 벌레 등을 죽이지 못하였다. 이제 진딧물은 그 체내에 ‘디디티’를 축척하게 된다. 초가지붕에 서식하고 있는 도마뱀이 그 진딧물을 잡아먹었다. ‘디디티’는 도마뱀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도마뱀을 쉽게 잡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고양이들도 죽어나갔다. 고양이가 없어지자 병을 전파시키는 무서운 쥐가 성하게 되었다(쥐떼가 들끓자 주민들은 말라리아보다 더 무서운 페스트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제 도마뱀도 죽었으며 구더기가 초가지붕에 죽어 있는 것들을 먹느라고 급격히 많아졌다(또 디디티를 이긴 나방유충이 행동을 개시했다. 나방유충이 서까래를 마구 갉아먹었다). 지붕이 풀썩풀썩 주저앉기 시작하였다. 살충제로 벌레를 죽일 때 그 배후의 사실은 동일한 유형의 해충들이 살충제에 대한 저항력을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해충을 죽이기 위하여 더 강한 약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충이 저항력을 기르지 못할 살충제는 없다고 한다. 살충제는 이른바 ‘자연의 균형’을 깨뜨려 놓는다. 기초생물체에 흡입된 오염물질이 2차, 3차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옮아가는 ‘생물농축’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현실의 우화’다. ‘환경오염’은 ‘생물농축’을 야기하고, ‘생물농축’은 다시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곤충이 보기 싫다고 살충제를 마구 사용하여 꽃가루를 옮기는 곤충들이 없어진다면 대부분의 꽃식물과 꽃들은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벌’ 하나만 사라진다 하더라도 10만종의 꽃식물이 사라진다는 추산이 있을 정도다. 도시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과연 하루에 몇번 흙을 밟는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인간이 왜 콘크리트와 시멘트에 둘러싸여 살아가는지, 편리만을 추구하다가 생명의 원시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두렵다.

과거 사법연수원에 다닐 적에 환경법학회에 속하였던 적이 있다. 그 뒤 말만으로 환경문제에 접근하였지, 실제 환경 관련 법체계나 제도에 대하여 변호사로서 부끄럽지만 상당히 무지함을 고백한다. 젊은 변호사들이 환경문제와 환경법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면 좌편향으로 몰아가는 사회풍토도 분명히 개선되어야한다. 사실 (환경)보호문제는 보수의 가치에 더 가깝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에서 사람과 기술 그리고 시스템의 조화를 찾는다고 하지만, 과연 말없이 고통을 받으면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자연이 우리를 기다려줄 리는 만무하다. 파괴의 나비효과가 하루빨리 보호의 나비효과로 나아갈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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