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에 대한 논의가 지금처럼 활발하게 이뤄진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낙태에 대한 논의는 법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연전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이 낙태에 관한 교황의 성명을 오해하여 낙태죄 폐지 청원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한 일로 천주교단을 방문하여 사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낙태를 반대하는 진영의 다양한 반대논거 중에서도 핵심적인 논거는 태아의 생명권 보호일 것이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무고한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범죄이다. 하지만, 의식은 물론 고통감수성까지 없는 시기의 태아에 대한 낙태, 정확히 말해 인공임신중절은 결코 무고한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태아가 인간인지는 예나 지금이나 논란이 되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과연 낙태를 반대하는 진정한 이유가 태아의 생명권 보호에 있는가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낙태에 대한 법적 규제가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아니라 출산정책에 의하여 좌우되어 왔다. 필자와 같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에 익숙한 세대에서는 모자보건법의 정당화사유를 찾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낙태가 일상화되어 형법의 낙태죄 규정은 사문화되었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접어들어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구급감의 우려가 현실화되자, 뒤늦게 산아제한이 아닌 출산장려로 정책의 기본방향이 급전환되었다. 이제 출산정책의 표어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나 ‘둘도 많다!’가 아니라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동생입니다’ ‘하나보다 둘, 둘보단 셋이 더 행복합니다’로 바뀌었다. 이러한 출산정책의 변화는 낙태에 대한 처벌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낙태에 대한 획일적인 처벌은 생명의 존엄성을 앞세워 인간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굳이 낙태를 처벌한다고 하더라도 낙태는 죄(sin)가 아니라 범죄(crime)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고민했을 여성이 숙고 끝에 선택한 결정에 대하여 비난하고 그 여성에게 죄의식을 심어줘서는 안 된다. 낙태죄를 무기로 자녀를 양육할 사회적,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하는 것은 여성을 출산기계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생명의 존엄성뿐 아니라 자율 내지 자기결정권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개인은 공동체를, 그리고 공동체는 개인을 필요로 한다.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 다른 구성원들의 지원을 받아 성장하며, 공동체는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여 유지한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출산정책이나 낙태정책, 이민정책과 같은 각종 인구정책이 필요하겠지만, 낙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난임부부 시술비 지원의 확대와 같은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무릇 인간행동에 대한 규율은 금지나 제재보다 장려나 지원이 더 효과적인 법이다. 그럼에도, 공동체가 낙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의무와 책임을 부담시키는 출산을 강요하는 것은 여성을 공동체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에 불과하다. 정책집행의 실패에 따른 부담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공동체에서는 정의가 없다. 굳이 칸트(I. Kant)를 소환할 필요도 없이 인간은 어디까지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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