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장군 등 소위 신군부는 김재규의 10·26 사건에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비상계엄사령관이 관여된 혐의가 있다면서 정승화 장군을 체포한 소위 12·12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권력은 전두환 등 신군부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고 10·26 이후 고조되어 가던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점점 어두워지게 되었다. 신군부는 정 장군에 대하여 내란방조라는 죄목을 씌워 군사법원의 재판에 회부했고 정 장군은 민간법원인 대법원에서 재판받을 기회를 포기함으로써 당시 비상계엄하에서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가 적용한 죄명인 내란방조죄가 확정되었던 것이고 이에 대하여는 1997년에 들어와 정 장군이 서울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여 동인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런데 내란방조라는 죄명으로 처벌하는 것이 가능한가. 내란죄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폭동할 때 성립하는 범죄이고 이에 대하여는 가담 정도에 따라 ①수괴 ②모의참여, 지휘 기타 중요임무종사자 ③부화수행, 단순폭동관여 등으로 나누어 법정형을 달리하고 있는 이른 바 폐쇄적 구성요건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내란죄의 경우엔 형법총칙의 공범규정은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통설적 견해이기도 하다{주석형법각칙(상) 38면, 한국사법행정학회 등 참조}.

따라서 정 장군에 대하여 적용한 내란방조라는 죄명은 통설에 의하면 있을 수 없는 죄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정 사령관에게는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김재규와 서울 등 어느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동을 모의하거나 김재규의 범행을 용이하게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이미 전두환 등 신군부는 12·12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 상고심 재판과정에서 김재규에 대한 죄목인 내란목적살인이 올바른 법적용인지 여부가 최대의 쟁점이 되어 전원합의체로 사건이 넘어가게 되었다.

김재규 피고인에게는 계획된 내란의 음모나 예비도 없었고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만한 폭동도 없었고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었다는 것이 주된 상고이유였는데 이러한 변호인의 상고이유에 대하여 당시 민문기 등 6인의 대법관은 “아무리 대통령이 피해자가 된 살인사건이라 하더라도 이를 당연히 내란목적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소수의견을 냈지만 곡절 끝에 대법원은 1980년 5월 20일 김재규를 내란목적살인으로 처단한 고등군사법원의 판결을 확정했는데 그 후 위 6인의 대법관이 타의에 의해 대법원을 떠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왜 이렇게 신군부가 김재규에 대한 죄명을 내란목적살인으로 하는데 관심을 갖고 집착했을까. 앞서 본 바와 같이 전두환의 신군부는 정승화를 체포하여 그를 내란방조죄로 처벌함으로써 군권과 국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 후에 이루어진 김재규에 대한 재판에서 김재규의 행위가 단순살인죄에 해당할 뿐 내란목적살인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정승화를 제거한 명분이 사라지게 되고 따라서 12·12 사건은 군사반란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어서 전두환 신군부의 존립근거가 없어지게 될 판이었다.

어쨌든 전두환의 신군부는 이래저래 자신들에게 자의든 타의든 협력하는 법률가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장악했다.

법률가들은 지금도 정치권력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수사나 재판을 함으로써 이에 방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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