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 단지의 한 주택에 절도사건이 발생했다. 집 주변으로 CCTV가 있었지만 범인은 그 위치를 알고 미리 CCTV를 위쪽으로 향하게 만든 다음 담을 넘어 침입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는 바닥이 벌집모양인 족적흔 1개와 목장갑 흔 1개 그리고 범인이 CCTV를 조작하기 전에 모퉁이부분에 희미하게 촬영된 옆모습이 전부였다. 경찰은 범인이 CCTV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점에 비추어 사전답사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현장의 CCTV 촬영 영상을 분석했다. 그리고 사건발생일 5일 전 범인의 모습과 유사한 남성이 주택의 뒷산에서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고 행적을 추적했다. 해당 남성은 인근 전원주택 단지를 이유 없이 오랜 시간 배회했고, 이후의 최종 목적지인 주거지 빌라의 입주민정보를 확인해 절도관련 범죄경력이 다수인 해당 남성을 특정할 수 있었다. 주거지를 압수수색을 하자 바닥이 벌집 모양인 운동화 한 켤레가 발견되었으나 피해물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피의자는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했고 지난 5월경 나에게 배당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 사건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범행 5일 전에 뒷산 산책로를 내려온 남성을 범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범행 당일의 CCTV에 잡힌 모습이 너무 흐렸고, 해당 CCTV에는 한달 분량의 영상이 있었으나 5일 전 영상에서 남성을 발견하고는 그 이전의 영상은 분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담당 형사의 증인신문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건 발생 5일 전 배회하였다는 인근 전원주택 단지는 현장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오르막길을 올라간 곳이어서 범행현장의 CCTV위치를 사전답사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기 어려웠고 증인신문과정에서 지도자료로써 담당형사에게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벌집모양의 족적흔 역시 유명상표에서 만들어진 운동화가 유행하며 흔히 발견되는 바닥모양으로, 수사보고에서 추측한 상표와 피고인이 소유한 운동화의 상표가 달랐을 뿐만 아니라 크기의 일치 여부도 불분명했다. 목장갑흔도 피고인이 목장갑을 소유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목장갑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범인으로 지목하기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에 족적흔과 CCTV영상의 모습의 대조를 국과수에 의뢰했으나 표본의 화질이 낮거나 변형되는 등으로 판독불가하다는 회신을 받게 되었다. 결국 육안으로 범행 당일과 5일 전에 뒷산 산책로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대조하는 것 이외에는 목격자도, 다른 물증도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위의 사정들은 사건을 진행하며 차차 밝혀낸 것이고, 사실 처음 사건을 배당받아 기록을 보며 든 생각은 피고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한 것 같은데’라는 심증이었다. 유사한 족적의 운동화가 발견되었고, 다수의 동종범죄전력이 있으며 수법도 유사했다. 피의자도 사건 발생 당일의 행적에 관해 뚜렷한 알리바이 없이 부인의 진술만 반복할 뿐이었고 범행당일 촬영된 흐릿한 옆모습이나 복장 또한 ‘육안상’ 피고인의 것과 다수 유사했기에 심증을 굳히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피고인의 변호인으로서 피고인의 말을 믿든 믿지 않든 사건을 맡은 이상 우리는 객관적, 직업적 양심으로 최선을 다해 그의 입장을 대변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

다행히 위 사건은 진행과정에서 수사의 미비점을 확인하고 피고인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었지만, 끝내 주관적 의사와 불일치한 채로 종결되는 사건들도 많을 것이다. 모든 사건이 나의 주관과 일치할 수는 없고, 변호사로서 ‘프로’다운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주관적 의사를 이유로 충실히 변호하지 못하는 것이 프로답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주관적 의사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직업적 양심에 따라 ‘프로’답게 변호하는 일은 해를 거듭해도 쉽지 않다. 그저 연차가 쌓이며 익숙해지거나 노련해지는 것이지 뚜렷한 답은 없을 것이다. 쌓이는 연차만큼이나 변호사로서의 ‘프로페셔널함’도 함께 쌓이기를 바라며 올 한해를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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