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육긍’이란 벼슬아치가 남전(南泉, 748∼835) 선사(禪師)에게 물었다.

“어떤 농부가 병 속에다 거위 새끼를 길렀는데 거위가 병 속에 꽉 끼도록 자라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거위를 죽이거나 병을 깨트리지 않고 병 속에서 거위를 꺼낼 수가 있습니까?”

선사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소리쳐 육긍을 불러 말했다. "거위는 벌써 나왔다. 어째서 거위가 나왔다고 하는가?"

이런 선(禪) 문답을 공안(公案) 또는 화두(話頭)라 한다. 화두 이야기 하면 조주(趙州) 선사가 “개에겐 불성이 없다”고 말한 ‘무자(無字)’ 화두를 빼놓을 수 없다. 조주의 스승이 남전이다.

화두 참구는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시인보다 은유를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48개의 화두가 실린 ‘무문관(無門關)’이란 책에 실린 선승들의 비유 설법(說法)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어떻게 해야 꺼낼 수 있을 것인가. 화두를 무시하고 새를 꺼내기 위해 병을 깨는 길을 선택해 보았다. 의도적 형성에 대한 자만심에 빠져 애쓰고 휩쓸리다가 어느 날 쓰러지고 만다.

끊임없이 법리를 따지고 승패를 저울질하면서 30년 이상 내 삶의 버팀목으로 굳어진 버릇은 물건처럼 비우고 싶다고 해서 금방 비워지지 않는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 치고 그곳에만 깃들이듯이.

변화무쌍한 현실과 관계없이 법률 문화적 개념에 의해 형성된 자아는 어느 순간엔 비워진 것 같은데, 불현듯 다시 찾아와 마치 병 속에 갇힌 새처럼 자신의 개념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60고개의 마지막 모퉁이를 돌고 있는 입동(立冬)엔 병도 깨지 않고 새도 다치지 않게 그 새를 꺼내야겠는데….

나만의 작은 깨달음은 노랗게 변한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순간 홀연히 이루어졌다.

매 찰나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에서 자신이 경험하는 감정, 생각, 갈망 등의 마음 현상을 알아차리고 이것들을 통제하고 지우기보다는 그냥 그대로 바라보는 방법에 눈을 뜬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볼 때 과거의 경험이나 감정의 영향을 받아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나를 포함한 법률가들은 있는 그대로 사물을 온전하게 수용하기보다는 당위나 규범을 앞세우는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다. 변호사들이 특별하다고 믿고 있는 고정관념은 사실 오랫동안 쌓아온 습관과 관계의 패턴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을 뭉뚱그려 이분법적으로 보면, 취하고 버리고 어긋나거나 맞는다 하여 서로 다투어 한쪽은 웃고 다른쪽은 눈물 흘리는 두 얼굴의 야누스이다.

직관(直觀)은 자신의 경험한 바를 존재하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머물러, 지켜보는’ 반조(返照)의 명상이라 할 수 있어 양변을 동시에 비춘다.

달빛이 물속을 스며들어도 그 흔적이 보이지 않고, 대 그림자가 뜰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제야 이 말귀가 좀 트이는 것 같다.

그동안 실패한 경험을 거울삼아 개념화된 자기를 포기한 까닭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견해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자유롭다.

새는 이미 나왔다. 초록이 떠나가 버린 11월의 낙엽수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새 봄을 향해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른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