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8일 저녁 코엑스 아셈홀에서는 고 황산덕(黃山德, 1917~1981) 박사의 탄생 100주년과 그의 ‘회고록’ 출판기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생전에 김범부(金凡父)선생으로부터 석우(石隅)라는 아호를, 경봉(鏡峰) 스님으로부터 취현(翠玄)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석우는 1917년 6월 18일 평남 양덕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고 1941년에 법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 22세로 황이선(黃利善)과 결혼하고, 고등고시 행정 사법 양과에 합격하였다. 총독부 지방관리로 근무하다 해방 후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법제과장이 되었다.

30세 되던 1946년에 신탁통치반대성명서를 기초하고 관절염으로 공직을 사직하고 가료하다 1948년 유진오 교수의 권유로 고려대에 국제사법 및 법철학 담당 부교수로 부임하였다. 그해 최초의 저서 ‘표준세계사연표’를 내었고, 이듬해 ‘국제사법’을 내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고 12월에 부산으로 피난하여 ‘법철학’을 내었다. 1952년 1월 서울대 법대 조교수로 발령받고 가르치다 상경하였다.

38세인 1954년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을 비판하여 논쟁으로 비화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11월에 ‘최신 자연과학의 발달이 법철학에 미친 영향’이란 박사논문을 제출하였는데 문교부의 거부로 1960년 4·19 이후에야 승인되어 한국산 제1호 법학박사가 되었다. 한편 1958년 42세로 김범부 선생을 모시고 이항녕 교수 등과 함께 동양사상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대학 내 사정으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물러나 1966년 9월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그해 12월 성균관대 학장으로 취임하고 이듬해 독일 본(Bonn)대학에 3개월 연구체류를 하였다.

1971년에는 건강악화로 변호사 사무실을 폐쇄하고 교수직만 유지하다가 1973년에 성균관대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1974년 8월 12일에 성균관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고, 한달만인 9월 18일에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0월 저서 ‘복귀’를 출간하였고, 최규하 내각에 법무부장관으로 유임되었다.

60세 되던 1976년 1월에 상처(喪妻)하고 3월에 중화민국을 방문하여 동오(東吳)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2월 4일에 제22대 문교부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12월 20일 사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 아래서 왜 장관직을 맡았느냐고 물으면 “보다 덜 나빠지라고”라 답했다 한다. 1979년 6월 1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회갑기념논문집 증정식이 있었고, 1980년 한국불교진흥원장에 취임하였다. 1985년 학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고, 한국형사법학회장이 되었다.

1989년 10월 19일 아침에 이런 짧은 게송문(揭誦文)을 써놓고 오후에 별세하셨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죽는 것은 아니다. 이웃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저 죽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 중에는 애통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얼마가 지난 다음에는 모두가 잊을 것이며, 나의 죽음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해서 죽어 없어진다. 그리고 그 죽은 사람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그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알 바가 아니다.” 그의 글씨는 참 정갈하고 단아하다.

나는 전공이 형법은 아니지만 법철학은 공통분야라 생전에 수차례 대화를 나누고 감화를 받았다. 이번 기념행사를 준비한 유족들인 황영채, 황영준 법대 선배의 부탁으로 사회를 맡았고, 안동일 변호사께서 읊조리듯 조용히 석우의 일생을 요약해 발표하셨다. 이어서 정대철, 송종의, 오윤덕, 유영 제씨가 생전의 석우에 대한 회상을 감명깊게 피력하였다.

참석자들에게 선사한 ‘회고록’을 집에 와서 읽어보고 석우의 학자적 치밀한 모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사연표’를 처녀작으로 내신 저자답게 자신의 일생도 국내외 사건들을 꼼꼼히 기록하여 놓으셨다. 예컨대 박사학위소동, 동아일보 필화사건 같은 개인사뿐 아니라 총장, 장관으로의 공직생활에 관해서도 치밀하게 정리해두고 계셨다.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증언을 제공하고 있다. 문세광 사건, 장준하씨 석방, 오글목사 추방, 불탄일 공휴일 제정, 겁주기 작전의 국민투표, 재소자를 줄이는 문제 등을 장관으로서 어떻게 처리하고 때로는 대통령과 담판하였는지 소상히 서술하고 있다. 아쉽게도 비매품이지만 이 회고록은 역사가와 법률가들에게 중요한 사료로 인용되어야 할 것이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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