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올해 10월 초에 유엔 인권최고대표실(OHCHR) 주최로 제네바에서 열린 ‘인권실사의무(human rights due diligence)와 기업책임’에 관한 협의에 참석하였는데, 특이하게도 외교관이 아닌 소송 전문 법률가들이 유엔 빌딩에 모여 흥미로운 토론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업의 해외 인권침해에 대해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소송현황이 소개되었고, 이어서 기존 불법행위법리의 한계, 인권실사의무의 도입 필요성, 개념 도입 시 발생할 문제점과 향후 도입 전망에 관해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다.

전통적으로 국가의 인권침해 문제를 주로 다루어오던 유엔 인권메커니즘에서 기업과 인권 문제가 화두로 등장한지는 이미 상당히 오래되었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2011년 채택한 ‘기업과 인권 지도원칙’은 유엔 차원의 대표적 대응사례로서,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높은 권위와 영향력을 인정받아왔다. 유엔 지도원칙은 ①국가의 인권보호의무, ②기업의 인권존중책임, ③피해구제 등 세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엔은 종래 두 번째 축인 기업의 자발적 인권존중책임에 관해 주로 논의하였으나, 국가의 인권보호의무로 점차 관심을 이동하다가, 최근에는 세 번째 축인 피해구제 분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인권최고대표실은 작년 6월 기업의 인권침해에 대한 사법적 피해구제 가이드를 발표한 후 앞서 언급한 협의를 진행 중이고, 2012년부터 매년 포럼을 개최해온 인권이사회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도 올해 11월 말에 피해구제를 주제로 제6차 포럼을 개최한다.

한편, 첫 번째 축과 관련해서도 다각적인 접근이 전개되고 있다. 프랑스는 올해 기업인권모니터링의무법(duty of vigilance law)을 입법하면서 유엔 지도원칙의 인권실사의무 개념을 도입하였다. 동법은 일정 규모 이상 대기업에게 해외 자회사 등 공급사슬(supply chain) 내 인권 상황을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여 보고할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위반하거나 손해가 발생한 경우 법원이 민사적 성격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게 하였다. 우리나라가 가입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위원회도 당사국에게 역외 기업의 인권침해 예방 및 피해구제 보장 의무를 인정하는 취지의 규약 해석을 제시하였고, 올해 9월 우리나라 보고서에 대한 심의 시 그와 관련한 권고를 한 바 있다.

법적 구속력 있는 규범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데, 인권이사회 내 정부 간 실무그룹이 올해 10월 말 새로운 협약기구와 재판소 설립이 포함된 규범요소에 관해 협의를 진행한다.

유엔 인권메커니즘의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직 국가 간 이해관계가 다르고 해결되지 않은 법리 문제도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업이 전 세계에 걸친 공급사슬(supply chain)을 형성함에 따라 세계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이제 누구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법률가들에게 이러한 상황은 세계 인권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한편, 민사법, 형사법, 인권법, 통상법, 국제법이 교차하는 새로운 법률 분야와 시장의 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 기업과 법률가들도 관심을 갖고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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