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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나침반]‘도덕적 해이’라는 망령
오수근 이화여대 법전원 교수  |  soh@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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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호] 승인 2017.10.30  09: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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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감면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다. ‘도덕적 해이’가 그것이다. 원래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의미와는 다르게 “부도덕해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용어의 의미야 정하기 나름이니 그렇다 치고, 빚을 안 갚는 것은 부도덕한 일인가?

이 대목에서 법률가들은 처음 법학을 배울 때 들었던 “계약은 준수되어야 한다”는 법언을 떠올린다. 계약을 준수하지 않았으므로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법은 채무불이행을 도덕적 비난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은 채무불이행을 미리 예상하고 채무불이행 시 치러야 하는 대가를 규정하고 있다. 계약의 해제, 강제이행 그리고 손해배상, 거기까지이다. 법은 채무불이행을 범죄로 보지 않는다.

채무자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는 법이 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신용이 나빠져서 상대방과 더 이상의 거래는 어렵다. 만일 상대방이 금융기관이라면 자신의 신용정보가 온 동네에 퍼지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크게 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을 안 갚을 때는 그럴만한 사유가 있다. 과중채무를 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실직이나 사업실패이다. 경쟁시장에서는 경쟁력을 잃은 기업이 나올 수밖에 없다. 기업이 문을 닫으면 종업원은 실직한다. 실직이나 사업실패는 도덕과 무관하다.

다음은 의료비이다. 중위소득 이하의 가정에서 뇌졸중 같은 중병 환자가 생기면 제 돈으로 3년을 버티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이 감기보험이기 때문이다. 병이 나는 것은 도덕과 무관하다.

돈이 없으면 기업은 문을 닫으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없어지지 않는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밥은 먹어야 하고, 자녀는 학교에 보내야 한다. 제 돈이 없는데 밥을 먹고 자녀를 학교에 보낸 것이 부도덕한 일인가?

열심히 일하면서 절약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갚으라고 계속 윽박지르면 채무자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열심히 일할 유인이 없기 때문이다. 갚을 수 없는 빚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은 채무자를 노예로 삼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998년 처음으로 법원의 면책 결정이 난 후에 지금까지 백만명이 넘는 개인이 면책을 받아 새출발을 할 수 있었다. 만일 면책 결정이 없었으면 그 백만명과 그들의 가족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면책결정에도 불구하고 채권금융기관은 가계대출에서 점점 더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고 대부업체의 수익은 해마다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채무불이행과 면책은 이미 그들의 원가에 반영이 되어 있다. 그들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이야기하면서도 과중채무에 짓눌려 있는 이들이 계속 돌려막기를 하게 한다. 무엇이 부도덕한 것인가?

1705년 영국에서 면책이 처음으로 입법되었을 때도 도덕성 논란에 휩싸였지만 1898년 미국 파산법에 이르러서는 채무자의 권리로 자리 잡았다. 블랙스톤이 설파한대로 면책을 통해서 채무자들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다는 인식이 수용된 것이다. 면책의 정당성은 이미 실험이 끝난 문제이다.

이제 법률가들이라도 ‘도덕적 해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나 빚을 못 갚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의 굴레를 법이 벗겨 주어야 한다. 법이 힘든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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