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싱글로 지내던 후배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하기로 했다기에 올 가을쯤엔 청첩장을 받게 되겠거니 했는데 웬걸, 그만두기로 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남자친구의 부모님, 그 남동생과 예비 동서 등 그의 가족을 만나보던 중에 이 결혼은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사연을 들어보니, 큰 며느리 맞기를 학수고대하던 그의 가족이 후배를 너무 편하게(?) 대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결혼하면 이 가족의 귀찮은 뒤치다꺼리는 곧 자기 몫이 될 것이라는 시그널을 어느 틈에 읽어버린 후배는 불편한 심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남자친구는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에게 싹싹하지 않다며 후배에게 불만을 가지더라는 것이다.

“겪어보지도 않고 미리 피할 필요가 있느냐,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조언했지만, 후배가 전혀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후배에게도, 내게도 그리고 여성변호사들은 물론 그 누구에게라도 ‘양성의 평등’이란 너무나 당연한 가치인데, 가정에서만은 유독 성 차별이 있었던 시대의 구습(舊習)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납득이 가겠느냐 말이다.

그럼에도, 가정마다 상당한 격차는 있지만, 위와 같은 당연한 가치가 완벽히 관철되고 있는 가정이 오히려 드문 것 같다.

즉, 대체로 소위 ‘맞벌이’를 하더라도 가사와 육아는 본래 ‘여성’의 것이고, 그래서 남편이 이를 하는 것은 아내를 ‘도와주는 것’이며, 며느리는 시집에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사위는 처가에서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통념, 구습이 많은 가정 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 시대의 당연한 가치와 아직도 뿌리 깊은 구습과의 격차 사이에서, 여성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성격 등에 따라 조금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데, 크게 ‘명분’을 중히 여기는 여성들과 ‘실리’를 중히 여기는 여성들로 나뉘는 듯하다.

즉, ‘명분’이 중한 여성들은 위에서 언급한 후배처럼 결혼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고(결혼을 거부하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실리를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결혼을 한 경우에는 가정 내 구습을 철폐하려고 노력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구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가족과 다툼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이 된다.

한편, ‘실리’가 중한 여성들은 구습과 어느 정도 타협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가사나 육아가 여성의 영역이라 인정하는 듯이 하면서 남편이 가사나 육아에 동참할 경우 고마워하고 칭찬하는 방법으로 독려하고, 시집에서도 적당히 일을 하는 대신 남편으로부터 그 보상을 톡톡히 받아내는 식이다.

어느 쪽이든 여성들이 위와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온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사정이 이렇기에 일찍이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이 지구의 마지막 식민지”이며 그 중에서도 양성의 평등이 가장 늦게 달성될 곳은 ‘가정’이라 단언했던 모양이다.

혼인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고, 어차피 멀지 않은 미래에 지금과 같은 가족제도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당장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가정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옳지 않은 구습은 이제 그만 역사책으로 보내고, 가정 밖, 사회에서는 오히려 이미 당연한 합리적 사고와 법, 배려를 가정 안으로 하루빨리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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