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건을 두고 두 사람이 발언대에 선다. 남편인 일본 무사 타케히로는 산적 타조마루에게 살해당했고, 아내 마사코는 겁탈 당한다. 사건 현장을 발견한 나무꾼이 관아에 신고했고, 사건을 진술하는 산적과 무사 아내의 진술은 엇갈린다. 죽은 무사의 영혼은 무당의 몸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세 이야기가 모두 다르다. 사건이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질 때쯤, 모든 진술이 거짓이라는 나무꾼. 그의 목격담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의 줄거리다. 이 영화를 통해 나온 사회학 용어가 ‘라쇼몽 효과’인데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의미다. 목격자와 당사자의 증언이 엇갈리는 상황은 지금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1950년 작품이지만 ‘라쇼몽’ 속 이기심은 현 시대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다.

9월 11일, 서울특별시버스운송사업조합 홈페이지에 ‘240번 기사 신고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퇴근 시간대 버스에 타고 있던 5살(실제로 7살이었다.) 아이만 내리고 엄마는 못 내렸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글은 엄마가 울부짖으며 내려 달라고 요청해도 버스 기사가 무시했고 심지어 욕설까지 했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온라인에서 글은 급속도로 퍼졌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분노는 버스운송조합 홈페이지를 마비시킬 정도였다.

버스 기사의 잘못은 없었다. 그는 일방적으로 날아드는 비난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대응은 불가능했다. 비난은 멈췄지만 기사는 심신 회복을 위해 휴직을 신청했다. 첫 글을 쓴 목격자와 당사자인 아이 엄마는 사과를 남긴 채 사라졌다. 하지만 일을 키운 가장 큰 책임은 언론에게 있지 않을까. 이날 한 매체가 커뮤니티 글을 보고 ‘단독’을 붙여 기사화했고 이후 셀 수없이 오보가 쏟아졌다. 문제는 그때까지만 해도 오보일 줄 몰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언론은, 아니 우리는 이미 악인으로 규정된 커뮤니티 속 버스 기사를 소비했다. 물론 군중들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확실한 사실을 전했다면, 그로 인해 자정작용이 이뤄졌다면 이번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스가 무서울 정도로 질주하는 상황에서 브레이크를 채우는 건 언론이어야 했다. 사건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봤어야 했다. 하지만 언론은 이날 분노를 소비하고 재생산했다.

‘라쇼몽’에서 진실을 말한 사람은 나무꾼 뿐이다. 객관적 목격자이자 탐구자로서 기자들은 나무꾼 역할을 다했을까. 누군가는 여러 커뮤니티를 거치며 왜곡될 대로 왜곡됐으니 언론은 주범이 아니라 자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봐줘도 공범임은 틀림없다. 지엽적인 분노를 국가적 분노로 뒤바꾼 건 누구도 아닌 언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날 ‘240번 버스’ 기사를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난 책임 없다’고 상황을 외면하기엔 빨개지는 얼굴을 감출 수 없다. 이 시대를 사는 기자들이 가진 공통된 고민이기 때문이다. 반성하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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