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지난 8월 23일 무려 46년 만에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을 거행했다.

실미도 사건은 1968년 1월 21일 새벽 북한의 124군 소속 특수부대가 청와대 뒷산까지 습격한 사건에 충격을 받은 당시 중앙정보부 주도로 그 해 4월 창설한 우리 측의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가 일으킨 충격적인 사건이다.

위 부대구성원들은 잘못 알려진 것처럼 사형수나 조직폭력배 출신이 아니라 투철한 국가관과 강인한 체력, 조국에 대한 충성심 등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발된 이들이었다. 이들은 31명 중 7명의 희생자가 나올 정도로 혹독한 훈련과정을 마치고 공군에 배속되어 공군정보부대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국가가 지키지도 못할 허황된 약속을 했고 특히 일반 병사들에 비해서 보다 융숭한 처우를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국은 남북화해 모드에 젖어들고 있었고 처우도 날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을 위한 예산배정집행 과정에서의 불법과 비리로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게되자 이들은 지휘계통을 통해서 수차례 그 시정을 요구했으나 반응이 없자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하자며 드디어 1971년 8월 23일 아침 점호시간을 기해서 일제히 궐기, 단체행동에 돌입했다.

초병을 비롯한 18명의 기간병을 살해한 뒤 인근해상을 지나는 선박을 위협하여 인천부두에 상륙하였다. 육지에 상륙한 이들은 버스 1대를 탈취하여 청와대를 향해 서울로 진행하다가 1차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소재 육군 제6관구 소속 장병들의 제지를 받았으나 어렵지 않게 그 저지선을 뚫고 서울 대방동의 국정 검인정 교과서 주식회사 앞까지 진격해 왔다. 그러나 증편된 막강한 저지병력에 막히자 격렬하게 교전하다가 20명이 사살되었고 생존자 4명은 생포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20여명의 사상자도 발생했다. 실로 충격적인 대형 참극이었다.

나는 그 당시 공군본부 보통군법 검찰부장으로서 이 사건의 수사와 기소 공판관여 및 사형집행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통해서 주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초병 살해 등 묵직한 죄명으로 1, 2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뒤 약속이나 한 듯 대법원에 상고를 포기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이 확정된 후 8개월이 지난 1972년 4월 중순 쯤 드디어 국방부로부터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명령이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나는 관할 헌병대장과 협의 후 그 해 4월 20일 오전에 사형을 집행하도록 준비를 서둘렀다.

사형집행 당일 출근과 동시에 나는 이들이 수감되어있던 헌병대 유치장을 찾았다. 나는 피집행자 4명 모두에게 형 확정에 따라 민간인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그날 민간교도소로 이감한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한명이 정색을 하며 나를 향해 “검찰관님, 그동안 너무나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제밤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뵈었는데 오늘이 부모님 뵙는 날인가 봅니다. 죽어서라도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괜히 불길한 소리를 하지마라”며 시치미를 떼고 엄숙하게 나무랐다.

그날 오전 11시 반경 오류동 소재 공군정보부대 뒷산중턱 분지에서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는 관여 검찰관으로서 우선 인적사항을 최종확인 후 판결문 낭독에 이어 최후로 이들의 유언을 청취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다소 표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하나같이 “그 고된 훈련을 받고서도 김일성의 목에 칼을 꽂지 못하고 죽는 게 한이 될 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얼굴에 씌워진 용수를 잠시 벗겨서 마지막으로 조국의 산야를 한번 더 둘러보게 해주고 애국가를 다같이 부르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을 비벼가며 한참동안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윽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것이었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말이다. 주위는 사뭇 고요했고 참여인들 모두도 눈시울을 붉혔다.

뒤이어 건장한 체구의 젊은이 4명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의 눈물겨운 애국심과 투철한 사명감을 보아서라도 그들에게 국가를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단 한번만이라도 부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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