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미술계에서는 고질적인 위작(僞作) 뿐만 아니라 대작이 논란거리이다. 최근 가수 조영남씨 화투 그림의 대작 논란이 법정까지 가게 되었다. 진중권 교수는 검찰 측 기소를 무식하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저작권에 있어서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진 교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진 교수가 무식한 것이다.

저작권으로 보호받기 위해서는 인간이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 있어야 한다. 추상적인 아이디어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저작물로 볼 수 없다. 문제의 화투 그림이 조씨의 사상이나 감정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면 이미 그의 작품이므로 대작논쟁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화투를 그림화 하는 아이디어와 그 지역사람에게 항상 노출된 솔섬에 대한 특정 시간에 특정 지점에서 사진을 담는 아이디어와 큰 차이점이 존재할까?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 타인의 작품을 대작이라고 하는 것은 허위의 창작자로 성명표시권 같은 저작인격권 침해가 될 수 있겠다.

진 교수는 회화에서 화가가 직접 붓을 잡은 것은 인상주의 이후 잠깐에 불과하며 르네상스 시절부터 조수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들은 거의 조수가 대작한다는 취지를 언급한 것으로 보도됐다. 르네상스시대에 대작했다는 사실이 현재까지 알려져 있으니, 그 시대는 조수에 의해서 대작이 된다는 것쯤은 공연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수는 아마도 도제나 학생이었을 것이므로, 해당 작품에 대하여 그 미술가의 수족으로서 작업에 관여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대작은 문제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저작권이 실정법체계로 편입되어 발전한 것은 1710년 앤 여왕법 이후이니 르네상스 시대의 이야기가 현재의 저작권법에 그대로 남아있을리가 없다. 그 이후 현재까지 이어온 관성이 관행이라는 이유로 합리화 될 수 없다. 특히 그러한 관행은 분명하지 않은 미술품의 출처를 만들어 위작의 근원이 된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많은 미술품을 제작판매하려는 미술계에서 성공한 기득권층의 자기변명일 뿐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제자의 논문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은 아주 비열한 행위로 인정되고 있다.

상품거래에서 중요한 것은 그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이다. 저작물이라도 상품으로 판매되는 한 더 이상 창작물이란 관점으로만 볼 수는 없다. 미술품 거래에서 소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상품들과 같이 그 미술품에 대한 정보이다. 누구의 창작품인지? 누구의 사상과 감정이 표현된 것인지? 일반 상품거래에서도 누구로부터 출처된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하물며 판화 등을 제외하고 그 하나 하나가 창작품인 미술품에 있어서 실제의 창작자는 미술품 거래의 투명성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다. 저작권법에서는 저작권의 양도나 라이선스는 있어도, 법인저작물 등 극히 예외를 제외하면, 타인의 창작물을 나의 창작물로 하는 입양제도는 없다. 이는 특허법도 같다. 대작과 위작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타인의 작품을 대작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 것이라 하는 것은 미술품의 창작자에 대한 혼동을 일으키는 기망행위로서 미술품 시장을 혼탁시키는 불공정한 거래(unfair trade)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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