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들은 감성 과잉시대에 살고 있다. ‘감성’이 변혁의 추동력으로 작동하고, 심지어 사실(FACT)도 압도한다. 예전처럼 언론의 객관적 사실보도를 기대하기 어려운 걸 봐도 알 수 있다. 감성에 휘둘린 가짜뉴스들이 판을 치고, 심지어 터무니없는 논평과 비평도 여과장치 없이 쏟아진다. 게다가 ‘두잉 굿’보다 ‘필링 굿’이 중요한 세상이다. 오늘 ‘나’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는 소비 트렌드, 바로 ‘욜로 현상’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감성’의 영역으로부터 ‘도덕’을 도출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거다. 그냥 이유 없이 좋고 싫은 거지 그게 옳고 그르기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성’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 바로 법과 도덕의 영역이다. 요새 법조계에 보다 진지한 자성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헌데,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유지해 주는 건 ‘좋고, 싫음’의 감성 영역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규범 영역, 바로 감성을 제어하는 법과 도덕이다. 허나, ‘감성’과 ‘이성’의 균형이 너무 심각하게 깨진 현상, 바로 장래의 ‘효과’보다 지금의 ‘느낌’이 훨씬 더 중요한 게 심각한 문제다.

게다가 ‘감성’이 개인 내면을 넘어 하나의 집단으로 자리 잡는 현상도 종종 보인다. 이 집단이 이성적 근거에 의한 옳음과 틀림, 즉 ‘도덕’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감성적 근거에 의한 좋음과 싫음, 즉 ‘취향’을 추구할 때,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이란 적지 않은 힘을 휘두르기 시작할 때, 그 거대한 힘은 종종 폭력적이면서도 일방적인 성향을 띠기 쉽다. ‘옳고, 그름’이 빠진 ‘좋고, 싫음’으로 집단을 형성할 경우 이 감성 집단을 상대로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법과 도덕을 요구하기란 무척 어렵다는 걸 인류는 여러번 체험했다.

중국 문화 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이용해 지식인과 예술인,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했고,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도, 독일 나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선동적인 감성의 광풍이 이성과 도덕의 마비를 불러왔던 거다. 그렇다. 미움과 분노가 강하게 부르짖는 건 더 이상 정의가 아니란 걸 보여줬다.

무언가 거대한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은 지향점이 ‘이성’과 ‘감성’ 어디에 근거한 건지를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혹여 집단의 힘으로 좋음과 싫음이라는 감성을 강요하면, 반대 감성에 근거한 또 다른 집단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결국 사회는 감성적 집단의 투쟁장으로 전락하고, 이성적 도덕은 설 자리를 잃고 말 거다. 거듭 생각해도 국가사회는 법과 도덕이 기본 중 기본이다. 제 아무리 추구하는 이념이 좋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개인의 지향이 거듭 특별한 보호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그게 과연 공동체에 진정한 유익을 갖다 주는 건지를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건강한 이성을 굳게 붙잡고 말이다.

특히 법조개혁을 앞둔 지금, 사실 어느 누구도 떳떳하고 당당하다 소리칠 순 없으리라. 실은 나도 늘 생각한다. 죄성에 몸부림치면서도 선악에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의 유한성을, 어느덧 존엄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안타까운 민낯을 말이다. 허나, 한가지 간절한 바람은 법조개혁이란 미명으로 감성이 이성을 압도하진 말아야 한다는 거다. ‘법과 도덕’ 대신 ‘여론과 감정’에 휘둘릴 순 없지 않은가. 이래저래 법조인들의 마음이 무거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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