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실이 없다.” 당초 박근혜 정부의 핵심 측근들은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에 대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관리한 사실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특검을 통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존재했고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에 대해 공적 지원을 배제하는 등 차별이 가해진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비선실세의 국정농단과 더불어 정권의 붕괴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경찰 등 기관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된 노동자의 명단을 작성·배포하여 더 이상 취직을 못하게 만든 것이 전형적인 블랙리스트의 예이다. 이러한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는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조직에나 위험 인물에 대한 감시, 처벌, 통제가 있을 수 있고 또 필요하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아마도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수하의 일부 공안의식에 사로잡힌 관료들에게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적절한 개입이자 애국적인 행위로 여겨진 듯하다.

그러나 블랙리스트는 그 안에 중요한 질문을 담고 있다.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떤 기준으로, 왜 만들었는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바로 이 속에 블랙리스트의 위험성이 있다.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작성되어 지원 배제, 적대, 검열, 통제, 탄압을 위해 사용되는 블랙리스트는 다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런 블랙리스트로 인해 유린되는 기본권이나 헌법적 가치가 참을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당초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인사들이 블랙리스트의 존재와 작성에 관련된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블랙리스트의 반인권적 문제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올해 들어 사법부에도 때 아닌 ‘블랙리스트’ 논란이 벌어졌고, 그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법원 정책에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판사들의 리스트가 작성되어 관리되어 왔는지가 논란의 핵심이다. 여기에 법원행정처가 대법원장의 권한 축소, 사법부 인사제도의 개혁 등 사법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판사들의 특정 학술단체 활동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의혹이 추가되었다. 만약 그러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는 사법부 스스로 사법권 독립을 수십년 전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시키는 불행한 일로서 ‘사법행정의 탈을 쓴 법관 독립의 침해’임이 명백하다. 그 전형에서 보듯이 블랙리스트는 본래 차별·배제·검열·통제 등을 위한 관리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그런 블랙리스트 작성 권한은 사법부 내 누구에게도 주어진 바 없다.

문제는 법원 자체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법원 내·외부의 의혹이 사그라지지 않는 데 있다. 2009년 이른바 ‘촛불재판 개입 의혹’에 대한 대법원 진상조사단의 조사결과가 많은 국민을 납득시키지 못했던 대목이 생각난다. 모름지기 사법부는 이번 블랙리스트 논란을 사법개혁의 기회로 삼는 지혜를 발휘해야만 하지 않을까?

일련의 블랙리스트 논란을 보면서 혹시나 우리 모두 우리만의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행여나 블랙리스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무의식에 내장되어 있었던 건 아닌지 돌이켜 본다.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도 더 이상 제2, 제3의 블랙리스트 사건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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