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을 기록을 통해서 접근하다 보면 쉽게 빠질 수 있는 일종의 매너리즘, 이를 경계하기 위해 수시로 떠올렸던 말이다. 법조인이란 직업이 기록을 통해 일을 하는 방식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되도록 사건현장을 직접 그리고 자주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당사자와 대면도 많이 하고, 불필요해 보일지라도 사건과 관계된 이야기는 충분히 시간을 투입해 경청하였다. 당연히 사건을 기록으로만 보는 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를 변론에 그대로 현출하는데 한계가 있을 뿐, 적어도 나와 의뢰인 사이에 사건에 대한 인식의 간격은 적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매너리즘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찾아오는 특성이 있다.

며칠 전 동료변호사와 공동대리로 진행하고 있는 사건이 과로사를 주제로 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송되었다. 지방에 거주하는 의뢰인이 방송사에 제보하였고, 의뢰인에 대한 촬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담당변호사의 인터뷰가 별도로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PD가 사무실을 방문했고 1시간 남짓 인터뷰를 했다. 사전에 동료 변호사와 시험 준비 하듯 예상질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인터뷰를 마치니 어느 정도의 분량이 방송에 반영될지 궁금하고 기대도 되었다. 이런 기대로 방송을 시청하였는데 허무하게도 목소리 하나 없이 인터뷰 모습만 잠깐 등장했다. 그나마 같이 인터뷰 했던 동료변호사의 목소리가 짧게나마 방송된 것이 수확이었다. 그런데 이 방송을 보면서 정작 얻은 것은 따로 있었다.

사건 의뢰인의 모습과 의뢰인이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사건의 내용을 영화처럼 생생히 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 사건의 소송대리인인 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의뢰인이 담담하게 또는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사건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설명하며, 같은 아픔을 지닌 다른 경험자들과 함께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이 생생하게 방송 되었다. 담당변호사에게 의뢰인들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저 사건을 맡은 변호사에게 의뢰인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전력을 다해 재판에 임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변호사에게 직접 찾아가 의뢰인을 대신해 그 간절함을 하소연하고 싶었다. 무겁고 부끄러운 마음이 몰려왔다.

돌이켜 보니 사건을 진행하며 제대로 의뢰인의 마음을 진지하게 공감하거나, 그들의 입장에서 가지게 되는 마음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사건진행에 필요한 말만 듣고, 가르치듯 내가 필요한 말만 했던 것 같다. 어느덧 나는 초심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것이며, 내 모습을 보겠다고 몰입했던 TV에서 마주친 내 의뢰인의 생생한 모습에서 비로서 이를 깨달은 셈이다. 구체적 사건은 현실감을 방해하는 종이기록이 되어 다른 기록 사이에 놓아두고, 당장 눈앞에 없는 의뢰인은 인식 저편에 밀어둔 채 기계적으로 사건을 진행하고 있었다. 새삼 소송 과정에서 안일했던 것은 없는지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고, 의뢰인이 편하게 아무 말이라도 할 수 있게 배려했었나 주말 내내 관조(觀照)의 자세로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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