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이 되면, 늘 좋은 말을 듣고 산다. 법조인을 대하는 사람들은 몸을 가지런히 하고, 얼굴을 다듬고, 말을 얌전하게 한다. 때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되 간곡하게 바른 말로 한다. 혹은 말발굽이 다 닳도록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돗자리가 다 떨어지도록 뭉개고 앉아 법조인의 입술과 얼굴빛을 살피면서, 그가 하는 말과 일이면 무조건 좋다고, 훌륭하다고 칭찬한다(박지원, 마장전). 그 뒤에 숨어 있는 개인적 이익이나 명예의 추구를 법조인이 간파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법조인은 그 듣는 말이 칭찬, 축하, 환대인지, 아부, 아첨인지 가끔 의심하기도 한다. 칭찬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아첨은 겉과는 달리 속으로 마음을 현혹시키는 것이라는 이론을 되뇌기도 하나, 현실에서 들리는 좋은 말이 칭찬인지, 아첨인지 판단하기는 만만치 않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격언에 기대어, 법조인은 좋은 말이 ‘적어도 나에게는’ 진실일 것이라고 간주하고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온 지 어언 70번째의 제헌절을 맞고 있다.

그런데 OECD의 ‘한눈에 보는 정부 2015’ 보고서에 따르면, 사법제도에 대한 우리 국민의 신뢰도는 OECD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27%, 2014년 기준). OECD국가 평균은 54%이었고, 덴마크는 83%, 일본은 65%, 미국은 59%이었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34%보다도 낮았다. 형사정책연구원 2015년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많은 국민은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은 법을 위반해도 처벌받지 않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더 심한 처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칭찬과 아첨을 구분하는 명백한 기준은 없는가? 기준을 잘 알고 있는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배웠다. 벌거벗은 임금은 입을 자격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새 옷을 입고 거리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한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소리쳤다. 신라 제48대 임금 경문대왕은 귀가 나귀의 귀처럼 길었다. 왕관을 만드는 복두장은 죽음이 임박하자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고,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그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어린 아이의 입과 대나무 숲의 소리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칭찬과 아첨의 판단기준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의 말과 자신이 섬겨야 하는 사람들의 평가 사이의 괴리이다. 다행스럽게, 오늘날 여론조사는 끊임없이 법조인에게 그가 섬겨야 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해 주고 있다.

국민의 신뢰도가 밑바닥에 있다면, 법조인의 귀에 들리는 좋은 말은 아첨, 아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예외’라고 자위하는 법조인이 가득할 뿐이다. 법조인은 스스로를 낮춰, 자신이 듣고 있는 좋은 말이 진심어린 칭찬, 환대가 될 수 있도록 거듭나야 한다. 사법개혁이 긴절하게 필요한 또 다른 이유다. 사법개혁은 국민들에게는 물론, 법조인들 자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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